세 가지 소원

동네 주말장을 돌아다니던 얄리는 한 허름한 가판대 앞에 멈춰 섰다. 얄리의 주목을 끈 것은 굉장히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나무상자로, 거의 거울처럼 번들거리는 표면에는 복잡한 문양과 상징들이 새겨져 있다. 장식들 중 눈에 띄는 것은 다소 기괴한 모습의 소인이다. 상당히 간소화 되어 있었지만, 소인이 거꾸러져 떨어지는 와중에도 악다구니를 쓰며 무언가를 저주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상자 겉엔 다소 투박한 금속 걸쇠가 달려 있는데, 자물쇠만 달면 비상금이나 군것질거리 따위를 정갈하게 숨겨놓기 좋게 생겼다. 얄리는 상인 아저씨에게 4 디지털 달러를 주고 상자를 얻는다. 그리고 곧바로 상자를 열어 비닐봉지에 그득하게 담아 두었던 잡동사니를 쏟아 옮긴다. 뚜껑을 닫으려 애쓰지만, 개중 어머니가 ..

세 가지 소원 2022.05.19 0

에이비는 화창한 아침에 깨어났다

에이비는 화창한 아침에 깨어났다. 졸린 와중에 1층 현관 앞에 종이 박스가 요란하게 뒹구는 소리가 들려온다. 배송 드론이 고도를 충분히 낮추지도 않고 택배를 떨어뜨린 것이다. 드론과 마주칠 기회가 있다면 한 소릴 해야 하겠다. 그래, 마주칠 기회만 있다면. 에이비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택배 상자를 뜯는다. 그녀는 드디어 원하던 드림머신을 손에 넣었다. 플라스틱 커스텀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밝은 노란색이다. 눈에 초점이 없는 펭귄 스티커도 몇 개 붙어 있다. 아무렴 어떤가. 드림머신을 생산하던 업체들은 대부분 도산한 지 오래였기에 오래된 중고라도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드림머신은 머리띠 형태를 한 기기로, 머리에 쓰고 버튼을 눌러두고 잠이 들면 뇌파를 유도해 자각몽을 꿀 수 있게 해주었는데..

굿 보이 스카이 블루 플러스

길버트 박사의 최면 육아법, 는 동명의 TV쇼 방영을 기점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부모들은 월 단위 구독 서비스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해 아이들에게 필요한 암시를 걸었고, 아이들은 항상 규칙적인 시간에 잠이 들고, 누가 깨우지 않아도 필요한 시간에 일어났다. 화면에 불규칙적으로 등장하는 다양한 도형과 문자 나열, 이어폰을 통해 듣는 고유 고주파 음은 아이의 잠재의식 속에 간단한 명령어를 입력할 수 있도록 그들의 정신을 한껏 유연하게 만들었고, 부모들은 그 상태로 애플리케이션 화면의 각 버튼을 눌러 아이를 몇 시에 재울지, 깨울지, 공부하게 할지, 혹은 더 온순하게 할지, 명석하게 할지 지정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암시의 도움으로 잔소리 없이도 스스로 학교 숙제를 해내고, 항시 예의 바르게 지냈으며, 성..

프로젝트 리모

유명 래퍼 리키 마커가 매입해 화제가 되었던 은 거대한 실내 수영장부터 프라이빗 영화관, 볼링 레인까지 변덕스러운 부호들을 위한 옵션들이 고루 갖춰져 있었다. 이 탐나는 저택을 차지하기 위해 중지 뼈에 이식했던 핑크 다이아몬드마저 경매에 부쳤던 리키는 어느 평화로운 여름밤 약에 취해 헬리콥터 채로 주택단지에 추락하고 말았고, 이후 민간에 유발된 광범위한 피해를 보상하고 상속인들이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저택은 그대로 새로운 주인을 찾아 경매에 부쳐졌다. “수영장이 무척 크군요.” 아반트 제약 대표 제임스는 수영장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 부동산 관리인은 가지고 있던 작은 미끼를 던질 차례임을 깨닫는다. “저택에 귀속되는 수영장 관리 서비스 계약 기간이 아직 12개월가량 남아 있어요. 수영장 관리를..

프로젝트 리모 2022.05.19 0

꼬마 기차 제이콥스

꼬마 기차 제이콥스는 처음 선로에 바퀴를 디딘 이래 가장 빠른 속도로 철로 위를 달리고 있다. 전면에 달린 얼굴은 이래저래 만신창이가 되었다. 왼쪽 눈꺼풀이 찢어지고, 턱도 한쪽이 깨져 떨어져 나갔다. 래미네이트 이빨이 덜렁거린다. 제이콥스는 얼굴의 온갖 상처를 할퀴고 지나가는 밤바람을 맞으며, 오랜 기억들을 떠올린다. 꼬마 기차 제이콥스는 자신이 만들어진 이래 굉장히 오랜 시간이 흘렀으며, 만약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더 이상 꼬마라고 부를 수 없었으리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이었던 뚱뚱보 역장님만 해도 이미 여러 번 교체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제이콥스를 떠나갔다. 협심증, 폐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합병증 등등…. 역장님뿐 아니라 그의 주변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과 함..

육각기둥 속의 유령들

북대서양 해저 2,300미터 부근에 위치한 심해저평원. 직경 5미터, 길이 35미터 사양의 육각 금속 말뚝이 뜨문뜨문, 그리고 무수히 자리 잡고 있다. 각 서버 말뚝은 점점이 빛을 내며 극저온의 세계에 구불구불한 아지랑이를 피워 올린다. 인공신경망 복잡계의 제7계층, 온통 순금의 빛깔로 번쩍이는 노름판에서 종일 슬롯 레버를 잡아당기던 베이브는 시각을 가리며 등장한 안내 문구에 깜짝 놀라 눈앞에 손을 휘젓는다. 안내 문구는 베이브의 서버 수용률 지분 감소, 수용률 대여분에 대한 상환 불가 판정, 그리고 퇴거 조치 유예 처분에 대한 내용이다. 약 15초의 퇴거 조치 유예 기간이 종료되자, 베이브는 막연히 라 불리는 상아색 공간으로 이동된다. 센터 중심에서 복잡계 관리자가 홀연히 나타난다. 관리자는 예를 표한..

웰컴 투 시자니아

조셉은 어느 날 편지 한 통을 받는다. 친척 아저씨가 그에게 자신의 모든 유산을 남겼다고 한다. 상속인. 첫 줄부터 등장한 세 글자는 조셉을 설레게 했다. 그러나 저택이나 금융 계좌 같은 단어는 어딜 보아도 없다. 변호사를 대동하고 대여금고 안의 물품을 수령하란다. 얼굴도 희미한 친척 아저씨. 내용은 그렇다 치고 마땅히 유산을 물려줄 다른 사람도 없었나 보다. 가뜩이나 사정이 좋지 않았던 조셉은 곧바로 스마트 패드의 길 찾기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목적지를 입력해본다. 이렇게까지 먼 곳이면 도리어 마릴린과 루크를 데려가야 하겠다. 며칠 후, 조셉은 대여금고의 커다란 서랍 앞에 도착한다. 아저씨의 금고는 고작 손가락 세 마디 높이의 일반 대여금고가 아니다. 가장 밑에 달린 캠핑 배낭만큼이나 큼지막한 서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