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시자니아

웰컴 투 시자니아

TAECKST 2022. 5. 26. 23:01

 조셉은 어느 날 편지 한 통을 받는다. 친척 아저씨가 그에게 자신의 모든 유산을 남겼다고 한다. 상속인. 첫 줄부터 등장한 세 글자는 조셉을 설레게 했다. 그러나 저택이나 금융 계좌 같은 단어는 어딜 보아도 없다. 변호사를 대동하고 대여금고 안의 물품을 수령하란다.

 

 얼굴도 희미한 친척 아저씨. 내용은 그렇다 치고 마땅히 유산을 물려줄 다른 사람도 없었나 보다. 여러모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조셉은 곧바로 스마트 패드의 길 찾기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목적지를 입력해본다. 이렇게까지 먼 곳이면 도리어 마릴린과 루크를 데려가야 하겠다.

 

 며칠 후, 조셉은 대여금고의 커다란 서랍 앞에 도착한다. 아저씨의 금고는 고작 손가락 세 마디 높이의 일반 대여금고가 아니다. 가장 밑에 달린 캠핑 배낭만큼이나 큼지막한 서랍이다. 상속 전문 변호사는 그간 질리도록 보아 온 상속자들 특유의 역겨운 얼굴 앞에 약지 크기의 금고 열쇠를 내민다.

 

 서랍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다. 첫인상부터 의심스럽지만, 실망하긴 이르다. 플라스틱 바구니에 옮겨 담기에도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조셉은 서랍째 뽑아 들고는 고객 응대실로 이동한다. 상속인들이 자신에게 떨어진 것이 무엇인지 샅샅이 해체해 확인하는 용도로 준비된 구획 같아 보인다. 벽면엔 집게나 빗자루, 메모지, 볼펜 같은 잡다한 도구들이 걸려 있다. 조셉은 노란 포스트잇 메모지를 한 장 뜯어 서랍에서 나와 비닐봉지로 들어가는 물건들을 기록한다.

 

 서랍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은 대충 이렇다. 흑요석으로 만든 구슬 2개, 오래된 구닥다리 코닥 필름 카메라, 더는 쓰이지 않는 규격으로 보이는 무언가의 충전 케이블, 주사위 3개, RC카 배터리와 컨트롤러로 추정되는 물건, 세계 각국의 냉장고 자석 기념품들, 연식이 한참 된 데이터 패드, 낡은 양탄자 1롤, 쭈글쭈글한 잡지 두 권, 황동으로 장식된 마리모 키우기용 어항, 싸구려인지 비싼 것인지 도무지 가늠되지 않는 담배 파이프, 파이프와 세트로 보이는 순전한 폼내기용 성냥갑 몇 개, 그리고 정체불명의 <시자니아> 로고가 박힌 화폐 뭉치 한 아름. 그리고 어딘가 화폐와 연동되는 것으로 보이는 짙은 녹색 다이아 패턴 무늬 플라스틱 카드 두 장, 트럼프 카드처럼 두 귀퉁이에 시자니아 화폐와 같은 폰트로 “S”자 로고가 박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정어가 적힌 절대반지 한 개. 조셉은 약지에 두툼한 절대반지를 끼운다. 뉴질랜드 여행의 기념품 따위일 것이다. 벌써 손가락 피부가 간지러워지는 것이 어째 쇳독이 오르는 것 같다. 온갖 쓰레기들만 나오자, 변호사는 어쩐지 신이 난 눈치다. “시자니아가 뭐예요?” 조셉이야말로 궁금하다. 나름 정교하게 홀로그램 무늬도 붙어 있고 빛에 비춰보니 복제방지 도식이 새겨져 있다. 인공섬의 모습으로 보인다. 분명 지폐 같이 생기긴 했지만, 어디 코딱지만 한 나라라고, 시자니아 공화국이라 던가 하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글쎄요…. 시자니아라….” 조셉은 상속 전문 변호사에게도 어처구니없는 술자리 소재가 하나 생긴 기념 선물로 50만 시잔 한 장을 건네주며 웃음인지 탄식이니 모를 소릴 낸다. “그만 가시죠.”

 

 조셉은 온갖 잡동사니를 파란 비닐봉지에 담아 차 트렁크에 던져 넣고, 교외의 호텔 방으로 돌아온다. 백색 침대에 그의 여자친구 마릴린과 그녀의 소울-애완견 얼룩무늬 개 루크가 널브러져 있다. 그들은 오랜 고행길의 노독을 푸는 중이다. 품었던 희망에 비해 지나치게 처참한 결론에 대해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륙을 횡단하다시피 해 도착해 손에 쥔 것이 고작 장난감 쓰레기 더미라니. 조셉도 이제 긴장이 풀리며 푹신한 침대 위로 쓰러진다.

 

 한참 뒤 오후 세 시 무렵이 되어서야 깨어난 조셉은 마릴린이 잡동사니 속에서 찾은 코닥 필름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발견한다. 빨간색 코닥 로고가 엉터리다. 이것도 중국산 모조품인 것이다. 이제 그녀도 안다. 기껏 기대한 먼 친척 아저씨의 위대한 유산이 그저 장난감과 쓰레기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코닥 카메라의 가죽 케이스 안쪽에서 조셉의 친척 아저씨가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흥청망청 노는 사진을 발견한다. 온갖 술병들 사이에서 뭔지도 모를 것에 취해 늘어져 있다. 누가 찍어준 것일까. 시자니아 카드는 두 장이니, 어쩌면 애인이 있었던 것일지도. 조금이나마 희망적인 것은 아저씨 주변에 온갖 시자니아 지폐가 흩뿌려져 있다는 점이다. 어딘가에선 사용되는 화폐인 것일까. 조셉은 눈을 가늘게 뜬다. 약지가 간지럽다. 조셉은 절대반지를 빼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린다. 루크는 혹 먹는 것인가 싶어 쓰레기통에 머리를 처박는다. “루크!” 마릴린이 재빨리 루크를 제압하고 사나운 이빨과 분홍 잇몸 사이에 물린 절대반지를 뽑아내 다시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 “필카에 들어 있는 필름은 일단 현상 맡겨 둬 보는 게 좋겠네. 다른 친척들에게 보내는 게 좋겠어. 잠깐만…, 필름 남은 건 우리가 마저 찍고.” 그들은 발랄하고 깜찍한 표정으로 셀카를 찍는다.

 

 위대한 유산 중 하나인 케케묵은 데이터 패드에 전원이 들어온다. 배터리는 거의 방전되어 케이블을 뽑으면 곧바로 꺼져버릴 것이다. “으악!” “왜 그래?” “클라우드 연동돼 있던 사진이 전부 삭제됐어. 이럴 줄 알았으면 와이파이에 연결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조셉은 로컬 저장소의 “삭제한 사진” 탭에서 겨우 살아남은 몇 장을 건진다. 데이터 패드로 찍은 사진은 선실 내부 상황으로 보인다. “아마도 크루즈선인 것 같은데.” 대부분 흥청망청 노는 사진이다. “이거, 대부분이 아저씨 사진인데, 대체 누가 찍어준 거야?” 애인이라면 같이 찍은 사진이 있을 법도 한데, 아저씨 사진만 잔뜩 있다. 메모장에는 대부분 의미 없는 내용들뿐이다. 아저씨가 즐기던 것 같은 몇몇 동물 대가리 맞추기 퍼즐 게임 같은 것이 있고…, 내비게이션의 탐색 기록은 굉장하다. “거의 전 세계를 돌아다닌 것 같은데….” “줘 봐.” 패드를 뺏어 든 마릴린은 검색 탭에 알파벳 “시자니아”를 입력한다. 무수한 쓰레기 메모들 중 하나가 검색된다. <시자니아에 대해 너무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좋아. 다음 정박지는 노르웨이 베르겐, 볼만한 것은 푸니쿨라, 어시장 쪽, 자석 기념품 챙기자.> “푸니쿨라가 뭐야?” “산악 열차 같은 거야. 이렇게 기울어져 있는.” “근데, 아저씨는 어쩌다 돌아가신 거야? 자세한 건 묻지 않으려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가니….” “나도 몰라.” “그게 무슨 소리야.” “상속인으로 날 지목하셨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려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 고인의 뜻 이래나?” 조셉은 어깨를 으쓱한다.

 

 노트북을 뚜들기던 마릴린은 이베이에서 몇몇이 개인 간에 시자니아 화폐, 즉 시잔화를 사고판 흔적을 발견한다. 검색 결과를 눌러 상세 페이지로 들어가자, 어째서인지 거래 페이지는 사라진 뒤다.

 

 <상품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릴린은 다음 검색 결과로 시자니아를 언급한 한 인터넷 기자의 블로그를 발견한다. 사진은 서버에서 지워져 확인할 수 없으나, 사진 밑 주석을 통해 시자니아 소속의 컨테이너선을 찍은 것이 그 자리에 있었으리라는 점은 확인한다. 블로그도 히스토리 페이지만 남았을 뿐, 아무런 흔적이 없다. 기자의 이름을 검색해보지만, 아무런 정보가 없다. 오페라 가수와 빠글머리 프로 스케이트 보더가 한 명 나올 뿐이다. 행방불명된 것일지도? 마릴린은 입술에 침을 바르며 선글라스를 쓴 수염 난 옥수수 아이콘의 새 브라우저 창을 열고 딥웹으로 접근한다. 시자니아를 검색하자 무수한 정보가 쏟아져 들어온다. “조셉,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봐.”

 

 조셉과 마릴린, 루크는 이름만 들어 보았던 서부 해안의 항구도시로 향한다. 황량한 국도 위로 폭풍우가 몰아친다. 굵은 장대비가 차량 지붕을 쳐대는 탓에 꽤 크게 얘길 해야 한다. 습하고, 좁고, 춥고, 시끄럽다. “시자니아의 무인 컨테이너선에는 민간 컨테이너 선적 화물을 위한 입구와, 시자니안, 그러니까 시자니아 고객을 위한 출입구가 따로 있다고 해,” “무인 수송선으로 운수업과 여객 사업을 병행한다는 것이로군.” 그리고 그 시자니안을 위한 시설 내부엔 시잔화를 취급하는 은행과 ATM기가 있으며, 전 세계 승객 누구든지 시잔화로 환전해 사용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시설이 있다고 한다. 분명 반대도 가능할 터. 이왕 생긴, 대략 12억 시잔쯤 되는 것을 전부 현금으로 바꿔 나올 생각을 하니, 그들은 이미 신났다. 시잔화가 정확히 얼마나 있는지 세어볼 틈도 없다. 일단 화물선에 탈 수 있어야 환전도 가능한 일이다. 이번에 정박하는 시자니아 컨테이너선을 놓치면 적어도 두 달은 더 기다려야 한다. 그들은 교대로 차를 몰며 벌써 노곤한 여행자들을 위한 모텔을 몇 개나 지나쳤다.

 

 <언제, 어디서나, 어디로든, 시자니아와 함께 하세요.> 한참을 달린 끝에, 항구에 정박해 있는 웅장한 시자니아 무인 컨테이너선이 보인다. 선체는 일부분이 청옥색 페인트로 덮여 있다. 언뜻 보기엔 그냥 조금 폼 나는 화물선 같다.

 

 조셉과 마릴린, 루크는 출항 시간을 반나절이나 지나 항구에 도착하지만, 폭풍우 탓에 아직 정박 중인 시자니아 배에 겨우 올라탈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구닥다리 차를 항구의 만물상 느낌의 슈퍼 주인에게 맡기고, 반나절 주차비와 함께, 근처 어딘가 사진관이 있다면 코닥 필름 인화도 맡겨 달라고 부탁한다. 슈퍼 주인장은 그들이 <시자니아인지 피자니아인지 하는 곳>에 가는 것이냐 묻는다. 온갖 인간쓰레기들이 선상 카지노인지 뭔지 모를 배에 올라가선 되돌아오지도 않고, 뒈져버린 것인지 그들의 주차된 차량이 온통 항구마을 골칫덩이가 된다는 것이다. “반나절 안에는 돌아올 거예요.” “아무튼 알겠네.” “금방 올게요.”

 

 “잠깐만.”

 “예?”

 “차 키는 맡기고 가시게.”

 

 께름칙하다.

 

 그들은 시자니아 고객 쪽 입구로 향한다. 입장료는 인당 50만 시잔, 혹은 그에 상응하는 통상 화폐다. 50만 시잔권을 두 장 뽑아 개표기에 넣자, 두 장의 카드가 나온다. 아저씨가 갖고 있던 두 장의 카드와 비슷하다. 디자인은 좀 바뀌었지만. 트럼프 카드처럼 두 모서리에 S가 붙은 것은 동일하다. 벽걸이에는 카드를 매달 수 있는 목걸이 줄이 디스플레이되어 있다. 그들은 각자 맘에 드는 색으로 골라 매곤, 개표기에 목걸이를 태그한다. “그냥 갖고 있던 걸로 썼어도 되는 거 아냐?” “이미 늦었어. 어서 가자.” 멋진 멜로디와 함께 차단기가 올라가며 그들을 환영해준다. 다행이다. 개는 무료다.

 

 라운지에는 이미 몇몇 고객들이 뜨문뜨문, 저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차림새를 보면 대부분 부유한 족속들 같다. 화물선의 단면도를 보니 이 거대한 무인 화물선은 대부분이 화물을 위한 컨테이너선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만, 갑판 아래에는 메가몰만큼이나 거대한 시자니아 고객을 위한 응대 시설이 꾸려져 있는 모양이다. 슈퍼 주인장 말대로 그곳엔 카지노도 있다.

 

 딩동.

 

 “고객님, 실례지만 첫 방문이신가요?”

 

 조셉은 화들짝 놀란다. 기둥의 스피커를 통해 원격 연결된 직원이 말을 걸어온 것이다. 자세히 보니 카메라도 달려 있다. “정박 중 라운지 입장과 쇼핑, 식사 등 시설 이용을 위한 비용은 지불하셨지만, 이 배는 곧 출항합니다. 이후의 정박지까지 여행 객실을 이용할 수 있는 시자니아 회원이 되시려면 다음 옵션을 확인하세요.” 바로 옆 안내 모니터에 관련 내용이 표시된다. 회원, 그러니까 시자니안이 되려면…, 1인당 실물 골드바를 1kg 예치해야 한다. 괴상하지만, 어찌 보면 전 세계 어디든 통용이 가능한 합리적인 신용 증명 방식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황금이니까. 초기 가입 시에 금을 예치하는 만큼, 어쩌면 약간의 인센티브를 더해 시잔화로 환전해주는 모양이다. 친척 아저씨는 골드바 따위를 물려준 적이 없다.

 

 “저희는, 그러니까…, 금방 나갈게요. 잠깐 ATM만 이용하면 돼요.”

 

 압도적인 럭셔리함 앞에서 조셉은 금방 비굴해져 버렸다. “잠깐, 조셉, 여길 봐.” 조셉은 모니터를 지긋이 본다. 또 다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검은색 구슬이다. 구슬은 다른 시자니아 배에 탈 때도 간단하게 예치 상태를 증명할 수 있도록 만든 도구인 듯하다. 여기저기 골드바를 들고 돌아다닐 순 없는 노릇이다. “아.” 분명 그런 게 있었지. 조셉은 바리바리 들고 온 파란 비닐봉지를 이리저리 뒤져 두 개의 흑요석 구슬을 꺼낸다. “이미 회원이셨군요. 잠시 검증하겠습니다.” 건너편의 안내원은 그들의 행색부터 파란색 봉지까지, 모든 것이 수상하다는 목소리다. 기둥에 콤팩트형 디지털 저울이 튀어나온다. 구슬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곳곳이 오목하다. 최대 세 개의 구슬까지 한 번에 올려둘 수 있다. 그들은 두 개의 구슬을 올린다. 저울은 소수점 세 자리까지, 정교하게도 검증한다. 저울 바닥에서 작은 막대가 올라왔는지 구슬이 잠깐 튀어 오른다. 뭔가 검증 구슬 특유의 주파수나 파동 따위를 검증하는 모양이다. “두 분 확인 되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디로든 시자니아와 함께,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스피커 건너편 직원의 어조가 어째 다소 친절해진 것 같다. 마릴린은 흑요석 구슬을 눈앞에 가져다 대 본다. 시커먼 구슬의 중심부에는 수많은 시자니아 로고들이 새겨져 있다. 아무튼 다행이다. 개는 무료다.

 

 내부는 겉에서 본 것과는 달리 휘황찬란하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진 시잔화 지폐 뭉치와 함께 럭셔리한 공간에서 활개 치고 다닐 자신감을 얻는다. 30만 시잔을 내고 비바람 맞은 몸을 위로할 겸 스파 코스를 체험하고, 5만 시잔에 짧은 볼링을 즐긴다. 그리고 뒤이어 15만 시잔을 내고 인공지능 기계 팔 마사지도 받고, 4만 시잔 짜리 칵테일도 마신다. 루크도 강아지용 호화 테라피 서비스를 받는다. 그들은 신나게 놀다가 폭풍우가 끝나 간다는 안내 방송을 듣는다. 출항하기 전에 ATM기를 찾아야 한다….

 

 그들은 파란 비닐봉지를 들고 헐레벌떡 뛰어다니다 한 복도에서 시자니아 ATM기를 발견한다. ATM은 시잔을 각국 화폐로 환전해 개인 계좌로 입금해준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했다. 다만 충격적인 사실은 환전할 때, 그 가치가 시자니아호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치의 5분의 1 정도로 졸아든다는 점이다. 아깝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배 밖의 화폐는 배 안에서 5배의 가치를 가진다는 얘기다. 예컨대 1kg의 순금을 예치할 때 5kg 순금의 가치만큼 시잔을 지급받을 수 있는 셈이다. “그런 것이로군.” 배 안에선 5배 부유해진다. 마릴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조셉을 마주 본다. “이게 말이 되나?” 그때 출항 1시간 전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그들은 다음 정박지인 도쿄항으로 향해야 할지, 아니면 ATM기로 출금을 하고 떠나야 할지 고민한다. “일단 이것도 해보자.” 아저씨가 쓰던 카드를 넣자, 여기에도 8천만 시잔이 들어 있다. “오오, 주님, 감사합니다.” 조셉이 아르데코 장식이 가득 새겨진 천장을 보며 아무개 신을 향해 짧은 감사 기도를 올린다. 안타깝게도, 다른 한 장의 카드는 인식되지 않는다. 망가진 것일까? 이건 누가 쓰던 것일까. 아무튼,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들은 일단 다음 정박지인 도쿄로 향하기로 한다. 아직 이 재밌는 배의 십분의 일조차 둘러보지 못했다. ATM기에 목걸이 카드를 태그한 뒤, 다음 정박지까지 사용할 객실을 빌린다.

 

 조셉과 마릴린, 루크는 객실에 얼마 되지 않는 짐을 풀어놓는다. 기본 객실은 넓진 않지만 그래도 배 안의 객실이라는 로망을 잘 구현해 놓았다. 조셉은 커다란 비닐봉지에 한 아름 들어 있던 시잔화를 금액 단위 별로 모아 정리하기 시작한다. 목걸이 카드 계좌에 넣으면 더 편리할 것이다. 마릴린은 함 내 슈퍼로 가서 파스타 면이라도 조금 사오겠다고 한다. 조셉은 지폐 무더기 사이에서 5만 시잔 권을 한 장 집어 건넨다.

 

 한참이나 지폐 무더기와 씨름하는 있는 도중, 마릴린이 음식이 무더기로 든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돌아온다. 5만 시잔으로 살 수 있는 식료품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그들은 오랜만에 포식을 벌인다. 동전만 한 플라스틱 통에 덜어진 캐비어를 떠먹던 조셉은 어쩌면 그다음 정박지인 상하이까지 가도 좋을지 모르겠다 한다. 마릴린은 환호성을 지르며 대찬성한다. 루크도 이 배가 마음에 들었다.

 

 조셉과 마릴린은 두 대의 ATM기에 시잔화 뭉치를 차례로 집어넣는다. 각자의 카드에 공평하게 시잔화를 나눠 입금한다. 아저씨의 카드에 있던 것도 반으로 나눈다. 조셉은 잠깐 눈을 감고 그 모든 것을 물려준 제임스 아저씨에게 감사 인사를 올린다.

 

 두 인간과 한 마리 개는 도쿄, 상하이, 마닐라, 싱가포르를 거쳐 호화로운 일주를 계속한다. 그들의 카드 속 각각 들어찬 무수한 시잔은 써도, 써도 줄어들지 않는 것만 같다.

 

 그들은 어느새 뉴질랜드 타우랑가 항에 정박 중이다. 고급객실 발코니에서 밤바다를 구경하며 시가를 피우다 안내 방송을 듣는다. 다음 정박지는 시자니안 아일랜드라고도 불리는 인공섬이다. 시자니아 소속 무인 화물선들이 그들의 연료와 배터리, 필요 물자를 보급하고, 민간에서 위탁한 환적화물을 내려, 각기 최단 거리로 향하는 배에 옮겨 싣기 위한 계류지로, 이 모든 것을 위해선 배마다 약 4~6일가량의 정박이 필요하다. “시잔화 지폐 복제방지로 그려진 그 섬이네.” 마릴린은 지폐를 위로 향해 다시 한번 그 인공섬의 모습을 비춰본다. 시자니안을 위한 여객 서비스와는 무관한 일정이었기에, 관련 승객은 이 기간에 시자니안 아일랜드에서의 모든 물품 구입과 숙박비 대금을 통상 화폐가 아닌 시잔화로 결재할 수 있으며, 아일랜드 하선 시 카드 목걸이 당 50만 시잔이 일괄 지급되는 혜택이 주어진다고 한다. 여기서 원하는 행선지가 있다면 다른 배로 갈아타도 좋다. 두 인간은 이미 시자니안 아일랜드에서 가능한 한 신나게 놀기 위한 걱정이나 하고 있다. 개는 육지를 실컷 밟고 다닌 지가 오래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불안한 기색이다.

 

 조셉은 시자니안 아일랜드에 내리기 전날, 물담배 바에서 놀다가 그만 잠들고 만다. 그리고 허둥지둥 내리다 그만 루크를 객실에 두고 내린다. 먼저 내려서 5성 호텔의 호화 시설을 구경하고 있던 마릴린은 조셉이 루크를 데리고 나올 줄 알았다며, 당황한다. 그들은 한참 지나 다시 루크를 찾으러 배로 돌아가려는데, 어째서인지 배가 이미 출항해 버렸다.

 

 인근의 안내용 기둥에선 원격 응대 버튼이 달려 있다.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직원에게 연결된다. 직원이 말하기를 하선 시에 시자니안 카드 목걸이 태깅으로 승객이 모두 내렸는지 검사하는데, 개는 카드가 없으니 배에 남겨져 버린 듯하다고 한다. 배들은 승객을 호텔 앞 정박지에 내려준 뒤, 기관 점검과 환적화물의 하선을 위한 별도의 정박지로 향하는데, 그곳에서 개를 찾아 되돌려보내 주겠다고 한다. 친절하게도 안심하라는 말도 덧붙인다. 아예 다음 정박지로 향한 것은 아니라 다행이다. 만약 그랬다면 몇 주 동안이나 루크와 헤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편치 않은 마음으로, 시자니안 아일랜드 5성 호텔로 향한다. 루크가 무서워하지 않고 잘 지내야 할 텐데.

 

 그들은 몇 시간 뒤, 호텔 방 입구의 인터폰을 통해 연락을 받고, 인공섬 반대편의 화물 하선 지역으로 향한다. 그곳의 분위기는 시자니안을 위한 구획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엄청나게 많은 컨테이너들과, 엄청나게 많은 시자니안 무인 화물선이 늘어서 있다. 컨테이너에서 나온 환적화물들은 팔레트째로 무인 트레일러에 걸쳐져 일사불란하게 이동하고 있다. 한 무인 트레일러의 팔레트 위에 루크가 있다. 이쪽으로 온다. 트레일러는 루크가 바닥으로 뛰어내리자 다시 알아서 어디론가 돌아간다. 그들은 다시 축축하고 매서운 바닷바람을 피해 5성 호텔로 돌아간다. 곧 폭풍우가 몰아칠 것이다.

 

 카드 목걸이를 찍어 체크인하고, 거품 욕탕의 따신 물에 셋이 함께 몸을 지진다. 씻고 나서 루크의 젖은 털을 말려주며 발바닥을 씻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루크의 털 무늬가 다르다. 그들은 당황스럽다. 다른 개를 받은 것일까.

 

 “너 루크 맞니?”

 

 개는 말똥한 눈빛을 할 뿐이다. 이름을 알아듣는 눈치이긴 하다.

 

 아닌 게 아니라 얼마 지나지도 않아 시자니아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어디선가 진짜 루크를 데려왔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다며, 다른 개는 데려가겠다고 한다. 두 마리의 개를 나란히 두니 더욱 기묘하다. 그야말로 데칼코마니다. 그 둘도 서로가 이상하다는 듯 서로의 꽁무니 냄새를 맡는다. 직원은 당황스러운 듯한, 그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름 모를 개를 데리고 나간다. 개는 낑낑거린다. 루크와 똑같은 소릴 낸다.

 

 조셉과 마릴린, 진짜 루크는 폭풍우가 이중창을 매섭게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당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생각을 가다듬는다. “그나저나, 또 씻겨야 하네.”

 

 조셉은 이런 기현상에 대해 더 이상 캐내지 않는 게 본인들 신상에 좋으리라는 훌륭한 직감을 따르기로 한다. 어쨌거나 그 개는 루크가 아니다. 엄청난 우연으로 닮은 것뿐. 그러나 마릴린은 그럼 그 개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묻는다. “걔 그냥 루크랑 다른 게 아니야. 무늬가 정확히 반대였다고.” “유전학적으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마릴린.” 조셉은 유감이지만 이곳의 누군가 그 반전 루크의 주인이 되어 길러줄 것이리라 여기자 덧붙인다. 말하고 나서도 께름칙한 결론이긴 하다.

 

 조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꿈 같은 생활이 무언가 악몽으로 뒤바뀌리라는 것을 직감한다. 양손 검지와 중지를 양쪽 관자놀이에 지그시 누르며, 진짜 루크도 되찾았는데 인제 그만 잊어버리자는 말을 하면 마릴린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시뮬레이션한다. 이건 좋지 못하다. 가만히 있자. 하지만 다시 이 얘기가 나오면 그 개는 절대 루크가 아니라고 계속 주장해야겠다. 그 개는 그저 단순한 말도 안 되는 우연일 뿐이라고….

 

 그때 멀리서 우렛소리가 들린다. 또 지겨운 폭우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마릴린은 창밖을 내다보다 작게 비명을 지른다. 아까 그 직원이 이름 없는 개를 마구잡이로 끌고 가고 있다. 다시 그 황량한 화물용 정박지로 향하고 있다. 아무래도 녀석은 곱게 자라긴 글렀다. 직원은 벌써 고집을 부리는 개에게 발길질을 한다. 고집 센 골칫덩이 개에 더해 비까지 오니 짜증이 나는 것이다. 개가 이쪽을 보더니 긴급한 도움을 요청하듯 울부짖는다. “루크야! 저건 루크라고!” 마릴린은 욕설을 내뱉으며 허겁지겁 다시 옷을 챙겨 입고, 조셉도 별수 없이 다시 축축한 옷을 입는다. 진짜 루크는 주인들의 허둥대는 모습에 짖기 시작한다.

 

 조셉과 마릴린은 이름 없는 개가 도착했던 구역을 지나, 멀리 비안개 사이로 사라져 가는 직원의 뒤를 쫓는다. 통제구역이라 쓰여 있진 않지만 아무래도 들어가선 안 되는 영역이 분명하다. 인간 손님을 위한 건널목 같은 것은 있지도 않다. 무인 트레일러들은 아직도 바쁘게 화물 팔레트를 옮긴다. 까딱 잘못했다간 로드킬을 당하기 쉬워 보인다. 조셉은 한쪽의 화물 비닐을 걷어내 본다. 상표 라벨이 엉터리로 인쇄된 보드카가 가득하다. 자세히 보니 문자가 뒤집혀 있다. 무인 트레일러가 왕래하는 보관 창고 안쪽을 들여다보니, 보드카뿐 아니라 대부분 상품이 반전되어 있다. 몇몇은 반전되거나 말거나 무관하지만, 어떤 것들은 구조 자체가 반전되어 활용할 수 없을 것처럼 생겼다. 예컨대 무수히 쌓인 노트북들은 키캡이 죄다 반대로 달려 있으니, 도저히 정상적인 인간이 쓸 물건이 못 된다. 소니 카메라 같은 것들도 촬영 버튼이 오른쪽이 아닌 왼쪽으로, 반대로 달려 있다. 왼손잡이가 아닌 이상 불편할 것이다. 디스플레이에 나오는 문자도 그렇겠지. 배터리나 메모리카드는 기존 정상 제품과 호환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제품들에는 구분을 위한 빨간색 스티커 따위가 붙어 있다. “마릴린, 그때 그 카메라….” 그렇다. 아저씨가 갖고 있던 코닥 카메라는 중국산 짝퉁이 아니라 뒤집힌 카메라다. 그렇다는 말은….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잡다한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낸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포장 상표가 뒤집힌 캐비어 통조림, 양상추 봉지, 밀봉 스테이크 등등…. 시자니안들에게 저렴하게 공급하는 각종 식재료나 물건들은 이런 요상한 뒤집힌 물건들로 이루어진 것일까? 이렇게 많은 뒤집힌 물건들은 대체 어디서, 왜 생겨난단 말인가. 단순한 불량품일까? 아니면 불법적으로 만들어낸 모조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개는 어느새 저 멀리 끌려가고 있다.

 

 빗속의 개는 마냥 뒤로만 물러나려 하기에 되레 끌고 가며 다루기 쉬운 모양새다. 마릴린이 비명을 지르듯 외친다. “루크 물어!” 정신없는 폭풍우를 뚫고 마릴린의 목소리가 닿았다. 루크가 직원의 장딴지를 왁 물어버린다. “봤지?” 직원이 쓰러진다. 마릴린과 조셉은 냅다 뛰어가 직원을 구타한다. 뒤집힌 보드카 병이 직원의 두부에 맞지만 깨지진 않는다. 직원은 그렇게 외마디 비명과 함께 기절한다. 이미 가뜩이나 놀란 개는, 수수께끼의 루크는 어째서인지 도망친다. 원래 자신이 있던 배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다. 마릴린은 루크를 뒤쫓는다.

 

 조셉은 거의 혼절한 직원을 한 번 더 걷어찬 뒤, 정박한 배로 향한다. 배에선 아직 화물이 내려지지 않았다. 반전된 무수한 화물이다. 루크의 재빠른 실루엣은 이미 배의 환적화물 하선을 위한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고 있다.

 

 마릴린과 조셉은 루크를 따라 화물선의 갑판 위에 오른다. 이제야 화물선 뒤편이 보인다. 망망대해 위로 말도 안 되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저게 뭐야?” 수면에 번개가 한 줄기 떨어지자, 수면 아래의 거대한 12킬로미터 길이의 고리 구조물이 잠시 일렁인다. 거대 고리에 비하자면 장난감처럼 보이는 화물선이 고리의 중심에 도착한다. “잠깐만, 방금 봤어? 마릴린?” 고리 중심에 도달한 화물선은 고리 중심으로부터 생긴 번쩍하는 작은 빛에 중첩된다. “번개인가?” 그리고 별일 아니라는 듯, 고리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리고 그 순간, 무엇인가, 감지할 수 없지만, 마음속 깊은 어딘가가 짙게 울리는 듯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 화물선이 지나간 고리의 중심 경로가 번쩍이고는, 또 다른 배가 나타난다. “잠깐만, 방금 봤어? 마릴린?” 어쩐지 방금 했던 말인 것 같은데…. “번개인가?” 이 말은 들었던 말이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다. 배가 또 생겼다. 머리가 어지럽다.

 

 두 배는 이제 서로 다른 색의 램프를 켠다. 하나는 초록색, 하나는 붉은색, 이젠 서로 다른 경로로 고리 지대를 빠져나가려는 듯하다. 조셉은 자신들이 올라탄 화물선의 램프를 본다. 붉은 램프다. 붉은 램프는 복제된 쪽을 의미하는듯하다. “마릴린, 이게 대체…, 배가 또 생겼잖아, 그렇지?” “그렇긴 한데….” “아, 그러고 보니 처음에 가입 예치금으로 받는 금괴 말이야. 아니, 그 전에 아저씨의 카메라…, 뒤집혀 있었지. 카드도 어째 두 개였고. 우리의 루크도….” 그때, 정박 중인 배의 붉은 램프가 꺼진다. “아, 이런.” 와르르 소리와 함께 거대한 사슬이 말려 올라가며 정박용 닻이 올라가 버린다. 화물 하선용 입구도 이미 닫히고 있다. 달려가 봐야…. “마릴린, 큰일이야. 이 배도 다시…, 글쎄, 그 짓을 하려는 모양이야. 이런 짓을 몇 번은 더 하려는 것이군.”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자신들이 아직 배에 타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부리나케 뛴다. “멈춰요! 제발!” 화물선 내부로 연결된 시자니아 고객 출입구에 도달한다. 사람이 모두 내리고 없으니, 미등만 켜진 상태다. “빨리 찍어봐.” 그들의 시자니안 목걸이 카드는 인식되지 않는다. 복제된 화물선의 태깅기 내부의 회로와 센서도 전부 뒤집혀 있는 것이다. “마릴린, 이런…,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이 배 뒤집혀 있잖아. 그러고 보니 입구 방향도. 이 기계도 다 반대야.” “조셉, 우리가…, 고리를 통과할 때…, 초록 램프의 화물선에 타고 있길 비는 수밖에…. 만약 붉은 램프 쪽이고, 내장 구조가 좌우 반전되면 나중에…,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 여러모로 좋지 않을 거야. 어쩌면 건강검진만 한 번 받으면 그대로 CIA에서 우릴 데려가 해부할지도.” “아니, 잠깐만, 여기 물건은 전부 반대로 생겨 먹었으니, 그들 기준으론, 이번엔 반대로 빨간 램프일지도 모르겠는데. 이젠 정말 모르겠다. 내 왼쪽 젖꼭지 밑에 점 있는 거 알지?” 무자비하게도 화물선의 출항 신호가 울린다. 어디에 있는 누구나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신호다. 심장이 저릿하다. “잠깐만. 작동 안 하던 아저씨 것, 카드 말이야. 두 장 중에 하나. 가지고 있어? 누구 것인지 알 거 같아.” 조셉은 무슨 얘긴지 단번에 이해한다. “본인 거였구나. 그러니까, 뒤집힌 아저씨 것.”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앞뒤로 뒤집어 본다. 트럼프 카드 형태라 눈치채기 힘들지만, 유심히 보니 로고가 반대로 뒤집혀 있다. “잠깐만, 지금 이걸 찍으면 우리 기록에 남아…. 평생 도망 다녀야 할지도 몰라. 아저씨도, 아니 아저씨들도 그렇게 도망 다니다 돌아가신 것일지도 모른다구.” “그런 걸 따질 때야?” 태깅한다. 카드는 정상적으로 인식된다. 다만 화면에 나오는 문구는 이러하다.

 지나갈 수 있도록 해치는 올라갔지만, “젠장, 너무…, 멀어.” 그들이 난간을 뛰어넘어 반대편 콘크리트 지면에 도달하는 것은 도저히 무리다. 잘해봐야 벽면에 코와 무릎을 처박고 시꺼먼 물속으로 떨어질 뿐. 만약 그런 거대한 도약이 가능하다는 데에 목숨을 걸더라도 루크가 스스로 건너갈 의지가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생존수영 수업을 들었어야 했어.” 거세게 진동하는 화물선 엔진도 멈추지 않는다. “씨발, 우리 아직 타고 있다고! 멈춰!” 안내용 기둥엔 전원이 들어와 있지도 않다. “이제 우리 둘이, 아니 넷이…, 그래, 루크까지 합하면 여섯, 아니 호텔 방에 있는 녀석을 합치면 일곱이구나….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그들은 고리를 통과할 것이다. 폭풍이 몰아치는 수면 위로, 시자니아 무인 컨테이너선이 나아간다. 수면 아래의 거대하고도 고고한 자태의 강입자 가속 시설의 고리 주변으론, 버려져 쌓인 텅 빈 거대한 배의 동체들이 널브러져 있다.

 

<끝.>

 

 

 

 

 

 항구 마을 현상소 노인은 눈을 찡그린다. 한심한 젊은이들은 때때로 기껏 현상 맡겨둔 사진을 까맣게 잊고 찾으러 오질 않는다. 그건 그렇고, 이상한 사진들이 한가득이다. 내가 변태적인 것이 아니야. 도무지 사진을 찾으러 오지 않는 놈들이 나쁜 거야. 노인은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며, 봉투에서 사진을 다시 한번 꺼내 본다. 이상한 필름이었지, 방향이 반대로 뒤집힌.

 

 “그 새끼들 아직도 안 왔죠?”

 

 슈퍼 주인장이다. 그는 조셉의 고물차를 손에 넣었다. 그들은 함께 사진을 본다. 망망대해의 수면 아래로 보이는 거대한 고리의 그림자, 옷차림부터 생김새, 턱수염, 눈 옆의 점까지 똑같은(정확히 말하자면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쌍둥이 남자의 근엄한 표정의 셀카, 그리고 깜찍한 표정의 셀카, 쌍둥이라기엔 너무 닮았는데…. 일사불란하게 정렬된 금괴들. “이놈들 부잔가?” 그 둘의 먹고 마시는 사진들, 두 개의 시자니아 로고가 박힌 무인 화물선 앞에 나란히 선 부자 쌍둥이. 마지막 사진은 그 쌍둥이가 어딘지도 모를 낙원 같은 섬에서 대강 휘갈긴 종이쪽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조셉, 이걸 보는 대로 너한테 준 우리 시잔화 죄다 디지털 루피아로 계좌 인출해. 그리고 인도네시아 북쪽, 누사 섬으로 와. 시자니아 배를 타. 부탁할게.> “이 새끼들 대체 뭘까요?” 다음 사진은 그저 한심한 표정의 두 젊은이 커플과 한 마리 개의 셀카다.

 

 “글쎄, 뭐 이런 일엔 끼어들지 않는 게 오래 사는 비결이지.”

 “어르신,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진짜 끝.>

 

- 22.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