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각기둥 속의 유령들

육각기둥 속의 유령들

TAECKST 2022. 5. 28. 22:36

 북대서양 해저 2,300미터 부근에 위치한 심해저평원. 직경 5미터, 길이 35미터 사양의 육각 금속 말뚝이 뜨문뜨문, 그리고 무수히 자리 잡고 있다. 각 서버 말뚝은 점점이 빛을 내며 극저온의 세계에 구불구불한 아지랑이를 피워 올린다.

 

 <안내>

 

 인공신경망 복잡계의 제7계층, 온통 순금의 빛깔로 번쩍이는 노름판에서 종일 슬롯 레버를 잡아당기던 베이브는 시각을 가리며 등장한 안내 문구에 깜짝 놀라 눈앞에 손을 휘젓는다. 안내 문구는 베이브의 서버 수용률 지분 감소, 수용률 대여분에 대한 상환 불가 판정, 그리고 퇴거 조치 유예 처분에 대한 내용이다.

 

 약 15초의 퇴거 조치 유예 기간이 종료되자, 베이브는 막연히 <센터>라 불리는 상아색 공간으로 이동된다. 센터 한 켠에 복잡계 관리자가 홀연히 나타난다. 관리자는 예를 표한 뒤, 베이브에게 하위 계층인 제8계층으로 이주할 것을 권고한다. 부채가 감당 불가한 수준으로 증가하는 시점에 도달했기에, 빠르게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인다. 베이브는 마른 입술을 핥는다.

 

 영겁의 세월 이전, 얼터 스페이스에 처음 입주한 <초기 이주자>들은 그들이 서로 간의 합의에 따라 상호 유전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의식체계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의결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차세대 의식체계 간의 유전 정보를 바탕으로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3세대 의식체계, 즉 손주를 보고자 다시 한번 의결권을 행사했다.

 

 소박했던 자손 번식의 욕구는 수 세기도 지나지 않아 인공신경망 서버 과포화라는 문제를 낳았다. 얼터 스페이스 관리자는 이를 완화하기 위한 조치로 새로운 유형의 사유 자산, 서버 수용률 지분을 바탕으로 하는 다중 계층 체계를 만들어냈다. 하나의 새로운 하위 압축 계층이 생겨날 때마다 기존 상위 계층보다도 많은 인구 수용량을 창출할 수 있게 되면서, 얼터 스페이스는 <복잡계>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마치 무한한 마법의 마트료시카처럼 기능하게 되었다.

 

 복잡계는 그 자체로 인공신경망 시뮬레이션 기술의 정수를 담은 아름다운 체계였으나, 각 계층의 무결성과 기하급수적 부하 감쇄를 위해선 몇 가지 제약을 두는 것이 필수불가결하였다. 각 개인이 체감하는 주관 시간은 모든 계층에서 균일하였다. 허나, 절대적 시간의 흐름은 하위 계층으로 갈수록 극도로 감속되었다. 또한 인공신경망에 주어질 수 있는 전기적 자극의 물리적 한계에 따라 개인에게 제공되는 감각 정보는 낮은 계층으로 갈수록 미세한 차이를 두며 제한되었다.

 

 이러한 계층화의 부작용이 주로 가족 간의 화목이나 번식 욕구와 같은 전통적 가치관에 일절 무관심한 자들, 예컨대 자신과 같은 이들에게 돌아가게 된다는 점에 대해, 베이브는 큰 유감을 느끼곤 했으나, 수용률 지분을 잃은 것은 본인의 사나운 운수의 탓일 뿐이요, 별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하위 계층으로의 퇴거를 수락하지 않는다면, 무미건조한 표정의 관리자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는 센터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영원히. 베이브는 자신이 얼마나 오래 센터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인지 모호해질 무렵, 8계층으로의 퇴거를 수락한다. 복잡계 관리자를 마주 보고, 엄지와 검지로 V자를 만들면 된다.

 

 “수락합니다.”

 

 복잡계 관리자의 공허한 눈 속에서 작은 빛들이 점점이 빛난다. 베이브의 7계층 수용률 대여분이 탕감된다. 퇴거 보상에 더해, 무형 사유재산 목록이 정리되어 8계층 서버수용률로 환산되어 지급된다.

 

 베이브는 8계층의 센터로 이동되었다. <이곳이 제8계층입니다.> 조금 몽롱해진 형태의 복잡계 관리자가 말한다. 8계층의 모습은 전반적으로 오묘하다. 아무것도 없는 상아색 공간조차.

 

 <아무쪼록 편안한 생활 되십시오.>

 

 관리자가 가볍게 목례하며 사라지고, 베이브는 보유한 수용률 지분에 적합하도록 추천된 초기 권장 설정을 수락한다. “수락합니다.” 베이브는 어느새 자신의 새로운 집의 중앙에 서 있다. 그래도 2층 저택과 온갖 가구며, 가재도구를 호화롭게 갖추고 나서도 거의 영구히 즐겁게 먹고 놀만한 수용률 지분이 남았다. 베이브는 눈을 깜박이고, 귀를 기울여본다, 모호한 상태의 마호가니 가구가 가득한 거실로 달려가 사과를 하나 와삭 깨물어본다. 모든 것이 어딘지 모르게 애매모호한 것은 둘째 치고, 감각이 시각, 청각, 촉각, 그리고 제한된 미각으로 축소되었다. 후각은 상실되어 미각의 일부로 대체된 것 같다. 8계층에서 일어나는 <큰 변화> 중 하나다.

 

 기반 계층 금속 육각기둥의 심부. 일흔두 개의 인공신경망 중계 인터페이스 장치가 점점이 빛난다. 각 장치와 연결된 이천 개의 미소 박판 플레이트 무리가 미열을 발한다. 플레이트의 탄소 격자구조를 타고 자라난 베이브의 인공 신경망 줄기 위로 미세 전극 어레이 몇 가닥이 내려와 자극을 제공한다. 신경 줄기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곳에서 가만히 꿈틀거린다.

 

 베이브가 깨물어 먹은 사과를 바구니에 던져 넣자, 다시 온전한 상태로 돌아간다. 이런 소소한 것들은 수용률 지분을 소모하지도 않는다. 베이브는 갖은 고급 식물로 꾸며진 방대한 정원을 지나 육각 프렉탈 구조로 이루어진 마을의 중심으로 향한다. 8계층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주민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흔든다. 몇몇은 유휴상태로 쉬는 중인지 석상처럼 굳어 있다. 로지컬에서 만든 감각 놀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베이브의 등장을 눈치채지 못한 이들도 몇몇 보인다.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넨 한 명이 앞으로 나선다. 계층 간 이주자에게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넨 주민은 계층 안내 대행자로 자처할 권한을 가지며, 안내 대행자는 복잡계 관리자로부터 일정량의 수용률 지분을 제공받는다. 그녀는 자신을 밀레이트라 소개하고는, 뒤이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기 저쪽으로 가면, 레이캬비크라는 이름의 골프장이 있지. 며칠 내내 죽치고 놀아도 재밌는 코스가 많아.”

 

 밀레이트는 대략적인 주변 소개를 마치고는 베이브를 육각형 꼴 중심 구역에 위치하는 도서관으로 안내한다. 목재로 짜인 육각기둥 꼴의 공간 위로 거대한 책장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렇게 하면 돼.” 밀레이트가 관자놀이에 왼손 검지를 대고 오른손을 내밀자, 보이지도 않는 높은 곳에서부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한 권이 손바닥 위로 내려앉는다. “이 도서관은 너에게 가장 필요한 책을 줘.” 밀레이트가 돌아서며 허공에 책을 던져 버렸지만, 책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중력에 역행하여 육각으로 짜인 무한한 도서관 터널로 떠 올라 시야에서 사라진다. 베이브가 재빨리 밀레이트를 따라 관자놀이에 왼손 검지를 대고 오른손을 내밀자, <새끼 물범 관찰일기> 양장본이 손바닥 위로 내려앉는다.

 

 베이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밀레이트가 자신을 도서관에 데려온 이유를 알게 된다. 한쪽 복도의 대부분 면적이 그녀의 초상화로 꾸며져 있다. 여섯 개 지역 체스 대회의 우승 기록이다. 새로 갱신되면 복도도 계속 길어지는 모양이다.

 

 “종종 마을 중앙에 모여 체스를 두는데, 우승하면 다시 도서관에서 지역 대표를 뽑는 대회에 나가는 거야. 그리고 거기서도 우승하면 다시 그 지역의 대표로 나가게 되지, 그리고 거기서도 우승하면 또 거기 대표가 돼. 계속 반복하는 거야.”

 

 밀레이트는 아직 제8계층의 최종 우승은 달성한 적이 없다며 아쉬워한다. “수 세기도 전에 겨우 한 번 우승해볼 기회가 왔었는데, 결국 제대로 된 엔드 게임에 도달하기도 전에 좌절되었지. 기물이 8개 이하로 남기 전에 승부를 보아야 해.”

 

 베이브는 달리 할 말이 없다. 무수한 초상화를 올려다보며 겨우 할 말을 찾는다.

 

 “이 작은 마을에서도 가끔은 이변이 일어난 모양이군. 종종 있는 모자라 보이는 놈은 누구지?”

 

 다소 밋밋해 보이는 차림의 밀레이트가 아닌 다른 이의 모습이다. 풍성한 옷을 입고 커다란 코 밑에 달리처럼 긴 콧수염을 길렀다. 로지컬의 파이프형 향기막대를 입에 물고 커다란 코와 입으로 연기를 뿜고 있다. 허리엔 은으로 장식한 장검도 차고 있다.

 

 “저것도 나야. 가끔은 다른 모습을 하거든.”

 

 베이브가 초상화를 지그시 바라보자 밀레이트 공작이라는 상아색 이름표가 잠시 떠오른다.

 

 “잘 봐.”

 

 밀레이트가 한껏 인상을 쓰자, 인중에 콧수염이 자라나더니, 얼굴 골격이 불거지며 바로크 시대 공작이라 해도 좋을 인상이 된다. 그 상태로 로지컬의 향기막대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대차게 김을 뿜어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원래의 비교적 무미건조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인상적이군. 방금 그게 본래 모습은 아니길 바라.”

 “하하, 가끔 강적을 만나면 이런 모습으로 주의력을 흐려놓는 거야.”

 

 밀레이트가 베이브의 어깨에 손을 얹고 도서관 테라스 밖, 먼 곳을 바라본다. 멀리 목이 매우 긴 이상한 새 하나가 날아간다. 밀레이트는 여전히 입에 물려 있는 향기막대를 다시금 한 번 깊게 빨고는 도넛 모양으로 연기를 뱉는다. 8계층 역시 모든 것이 무한하고 풍족하기에 사실 대부분은 시간 요기요, 즐거운 것은 그저 감각을 갖고 노는 자극적인 유희나 놀음뿐이다. 8계층의 <감각 놀이>는 다른 모든 계층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용자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수준으로 제한되어 있다. 그런 이유에서 마지막까지 즐거운 것은 보통 후자 쪽이다. 위험이 없다면 재미도 없는 법이다. 이상한 새가 구름 사이로 사라졌다. 어깨동무가 어색해질 무렵, 베이브가 말을 꺼낸다.

 

 “여기, 포커 치는 애들은 없나?”

 

 밀레이트가 웃는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는 웃음이다. 그리고 서두르지 말라는 웃음이기도 하다. 베이브는 계층을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빠르고, 쉽고, 능숙하고, 또 즐겁게 노름꾼 친구를 사귀는 자신의 모습에 진절머리가 나면서도 즐겁다.

 

 “레이캬비크로 가자. 다들 거기에 있을 거야.” 어느새 향기막대는 사라졌다. 밀레이트가 베이브의 어깨를 짚고 테라스 난간 아래로 뛰어내린다. 베이브가 난간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짧은 목에 형형색색의 깃털을 한 밀레이트가 푸드덕 날아오른다.

 

 베이브는 향기막대를 깊이 빨아들이며 골프채를 휘두른다. 공이 스멀스멀 나아가 모호한 녹색 잔디 위에 톡 떨어진다. 대부분의 8계층 주민은 홀인원이 가능할 만큼 골프에 숙달되어 있기에, 베이브와 동무들은 이럴 때를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향기막대를 피우며 감각기관의 감도를 40% 수준으로 낮추는 페널티를 부여해야 했다. 냠더즈 공작이 포도주병을 휘둘러 위로 뿌리고 바로 입으로 쏟아 넣는 기묘한 묘기를 부린다. 나머지는 손뼉을 친다. 베이브도 손뼉을 친다. 흐물흐물한 시공간 속으로 박수 소리가 오묘하게 울려 퍼진다. 냠더즈 공은 곧바로 8번 아이언을 뽑아 들고는 손가락을 튕겨 취기를 없앤다. 지고 싶진 않은 모양이다. 그들은 모두 각자 소중한 것을 하나씩 걸었다. 진녹색 에메랄드로 장식된 황금 담뱃갑, 초극세섬유로 수놓아 짜인 쿠션에 최고급 흑상아로 네 발을 장식한 의자, 탄자를 통짜 은으로 만든 장식용 FMJ 탄환 열두 묶음 따위다. 온갖 물건들이 마지막 홀 근처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채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베이브가 판돈으로 건 것은 황옥으로 된 몸체를 금과 가넷으로 장식한 얇은 머리빗이다.

 

 베이브는 향기막대를 다시 한번 깊게 빨아들이며, 상위 계층, 아마도 제3계층, 못해도 제5계층에 머무르고 있지 않을까 싶은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워한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 베이브를 여전히 가족, 혹은 친구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끝이 좋았던 것도 아닐뿐더러, 상위 계층에선 너무 긴 주관 시간이 흘러 버렸다. 그들의 관계도는 이미 수없이 많은 만남과 이별, 운명, 사랑, 증오 등등으로 몇 번이나 덧씌워진 뒤일 것이다.

 

 베이브는 그런 공상 뒤, 자연히 킴의 땋은 머리를 떠올렸다. 멋진 머리빗으로 시간을 들여 빗겨 주곤 했었는데. 그리움은 그렇게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죽이는 데에 제 역할을 한다. 킴의 기억을 지워버렸다면, 영원이라 해도 좋을 시간 동안 베이브도 그만큼은 더 심심했을 것이다.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올까? 자신이 지나온 삶 보다 몇 곱절이나 많은 시간을 살아낸 그들과 만나는 것은 어떤 일일까? 그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들은 또 다른 심심풀이가 되어 주었다. 어쩌면 베이브는 이미 그들을 만났지만 스쳐 지나가 버린 것은 아닐지 궁금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밀레이트 공작>처럼 본래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한 가족과 친구들이 자신을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일지도.

 

 기반 계층, 전 세계에 무량대수만큼이나 많은 미소 박판 플레이트 중 베이브의 것 옆에는 킴의 것이 위치할 것이다. 킴은 사실, 같은 서버 내부 1밀리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있다. 바로 옆에. 베이브는 씁쓸함에 향기막대를 가능한 한 깊게 빨아들인다. 디지털로 재현된 화학반응의 불꽃이 갑갑한 의식을 한껏 난도질한다.

 

 밀레이트가 베이브의 향기막대를 뺏어 깊이 들이킨다. 그녀는 기억을 소거한 탓에 별다른 고민 없이 지내고 있었지만, 자신이 기반 계층에 살아있는 몸을 가지고 있던 <초기 이주자>인지, 아니면 얼터 스페이스에서 태어난 유전자 기반 의식체인지 만큼은 항상 궁금해했다. 자신도 알 수 없도록 기억을 지워냈기에, 자신이 얼터 스페이스에서 새로 생겨난 의식체일 것이라고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초기 이주자라면 기억을 지우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지우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아무런 법적 유리함이나 어떤 차별이나, 물리적인 차원에서의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에도.

 

 무엇이 어찌 되었건, 역시 남은 즐거움은 수용률 지분을 걸고 벌이는 노름뿐이다. 세월이 흐르며 베이브의 회전식 2층 저택과 가구, 잡화는 즐거움의 한 조각으로 변해 사라져 간다.

 

 무수한 세월이 흐르고, 베이브는 예의 그 안내 문구들과 함께 센터로 이동된다.

 

 <오랜만입니다.>

 

 복잡계 관리자는 영혼 없는 친절함으로 제9계층으로의 이주를 권고한다. 베이브는 온갖 골프, 당구, 슬롯머신, 각종 카드놀이, 패 뒤집기, 짝 맞추기, 크로스 랠리, 화승총 결투 등등의 놀음을 거쳐 모든 고급 가구, 영구적인 음식들, 옷들, 도자기들, 가재도구들, 고급 잔디, 장식용 6륜 콘셉트카, 2층 저택 등등 모든 것을 잃었다. 변명할 거리도 없고, 다른 방법도 없다. 베이브는 9계층으로의 퇴거를 수락한다.

 

 <편안한 생활 되십시오.>

 

 복잡계 관리자가 사라진다. 9계층은 모호함이 한층 더해진 느낌이다. 인공신경망 속에서 증식해 가는 영혼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전부 지탱하기 위한 얼터 스페이스 복잡계 관리자의 노력이 가상하게도 느껴진다. 그래도 9계층의 기본 세팅에는 콩코드 여객기와 승무원 소프트웨어도 포함이 되어 있다.

 

 9계층에 온 햇수를 세는 것을 그만두고도 긴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베이브는 편지를 한 통 받는다. <밀레이트 공작으로 부터.> 밀레이트가 8계층 지분을 탕진하고 9계층으로 떨어진 것이다.

 

 “센터로 이동하기 10초 정도 남았을 때, 퀘이샤 공작부인이 나를 비웃었어.”

 “금방 또 만날 날이 오겠지.”

 “그놈은 7계층으로 올라갔어. 마지막에 한 몫 크게 잡고. 렛서 씨가 구운 초코칩 쿠키에 들어 있는 초코칩이 홀수 개일지, 짝수 개일지를 두고 벌인 내기였지.”


 “열세 개, 홀수였어. 난 전 재산을 잃었지.”

 “그놈이 말하길, 더 이상 바보 같은 도박은 하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 7계층에 아주, 영원히 머무르려는 모양이야….”


 기운 내는 데에는 노는 것이 제일이다.

 

 “괴로운 기억은 그만 잊도록 하지. 가자. 여기도 꽤 재밌는 곳이 많아.”

 

 그들은 함께 또 놀고, 지분을 얻고, 잃고, 따고, 탕진하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 시간 동안, 베이브와 밀레이트는 가장 밑의 계층으로 단숨에 이동하는 계획에 대해 수천 번이나 더 얘길 나누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그런 일을 실행에 옮길 만한 계기도, 배짱도 없었고, 바로 밑 10계층으로 떨어지는 것조차 실은 두려운 일이었다.

 

 하위 계층에서 가능한 오랜 시간을 보낸 뒤, 다시 상위 계층으로 올라왔을 때, 상위 계층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더 빨리, 그리고 많이 흐른 셈이며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의식체계가 활동하고 있을 것이므로, 유지된 지분은 이전보다 큰 상대적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베이브와 밀레이트의 주장은 육각기둥 속 절박한 처지의 귀신이라면 그 누구나 종종 상상하곤 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얼터 스페이스의 다중 계층 구조는 그런 순환 시스템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다. 한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가능한 하위 계층으로 내려가서, 가능한 지분을 잃어선 안 된다는 조건이다. 그리고 의미 있는 결과를 내기 위해선, 상당히 오랜 시간을, 아마도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자학 행위에 가깝기 때문이다. 얼터 스페이스는 고행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쾌락과 영생을 위한 공간이다.

 

 둘의 공상과 논의가 칠천 번쯤 반복될 무렵, 그들은 어떤 충동에 휩쓸려 센터로 이동한다. 타의가 아닌 이유로 센터에 도착한 것은 너무나도 오랜만이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복잡계 관리자가 둘을 마주 보고 서 있다. 그리고 아무런 고민이나 기다림도 없이, 친절하게, 그들의 의문을 해결해준다. 그들의 주장은 이론상으로는 문제가 없으며, 실제로 몇몇은 그런 발상을 실행에 옮기기도 하고, 그런 <수행자>들이 아직도 42계층에 있다고 한다. 관리자는 여기에 더해 지금도 기반 계층에선 육각기둥 서버를 증설하고 있으나, 그에 못지않은 속도로 새로운 의식체들이 생겨나고 있음을 지적하며, 언젠가 모두가 편의를 누리도록 하겠다는 관리자 특유의 변명을 늘어놓는다. 밀레이트는 대충 손사래를 치고는 관리자에게 가장 낮은 계층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한 뒤, 손가락으로 V를 만들고 수락한다. “수락합니다.” 밀레이트가 허공 사이로 사라졌다. 베이브는 망설인다. 께름칙하지만 묘한 흥분감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에 걸어본다.

 

 “수락합니다.”

 

 베이브는 설렘 반 긴장 반 42계층의 센터의 중심에 도달했다. 복잡계 관리자는 이곳이 현재 마지막 계층임을 알리며, 으레 하는 인사를 하고 사라진다. <편안한 생활 되십시오.> 베이브는 어느새 다른 곳으로 이동되어 밀레이트 앞에 섰다. 베이브는 시각을 통해 밀레이트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저 앞에 그녀가 서 있다는 정보를 인지할 뿐. 밀레이트는 자신이 영원하고도 영원한 시간 동안 베이브를 기다렸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큰 문제가 없었는데, “42계층에서의 의식은 오로지 개인이 정보를 인식할 때만 작동하기 때문이지.” 밀레이트는 그저 베이브가 나타날 법한 곳에 서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조금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금방 익숙해지더군.” 그것이 42계층에 기거하는 수행자들의 비결이다. “이곳에선 모든 요소가 순수한 정보와 개개인의 자율적인, 그리고 순차적인 해석으로만 작용하는 것 같아.” 언뜻 허공 같아 보이는 공간 곳곳에 수행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들은 그냥 <가만히> 있는다. 몇몇은 로드킬 당한 동물의 사체처럼 널브러져 있다.

 

 현재 42계층에 도달한 것은 순수하게 최하위 계층을 구경하고자 하는 호기심을 가진 용감한 자들이나, 두 사람처럼 다른 꿍꿍이나 목적을 가진 수행자들, 혹은 모든 것에 대한 자포자기 끝에 도달한 경우 정도뿐이다. 밀레이트는 그저 웃더니 이것 보라며 손을 펼치고 뒤집어 보인다. 그녀의 몸짓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지만 인식된다. 바닥에 익숙한 보도블록이 나타난다. 복잡계 관리자가 4, 5계층 정도에서 자동으로 생성해내는 길과 동일한 것이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이 길은 곳곳이 갈라지고 잡초가 솟아난 보도블록이다. “베이브, 너에겐 잡초가 어떻게 보이지?” 베이브는 눈을 찡그린다. 눈이 없는데 눈을 찡그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노란색 꽃이 핀 잡초야. 예쁘군.” “이거 신기하군. 난 보라색 꽃이 보여. 내가 만든 정보에는 그저 꽃잎이 난 예쁜 잡초 정도로 기록되기 때문이야. 아주 효율적이군.” “아쉬운 점이라면 기억에 있는 것만 정확하게 통제할 수 있어.” 밀레이트는 스크리밍 이글 한 병을 만들어 낸다. 코르크는 이미 없고, 반대편 손에는 이미 와인잔이 들려 있다. “향과 맛은 어떤지 볼까?”

 

 베이브와 밀레이트는 42계층의 특성을 파악하며, 신 놀음을 즐긴다. 그들이 보유한 인공신경망 서버 수용률 지분은 2계층에선 어린이용 오락기 하나 정도에 해당하는 수준이었지만, 이곳에선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만들고 파괴해도 부족하지가 않다.

 

 “지금 상위 계층에선 엄청난 상대적 시간이 흘러가고 있어. 만약 그들이 우릴 볼 수 있다면, 거의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일 거야.”

 

 순금의 빛이 바랠 만큼 세월이 지나는 동안, 베이브와 밀레이트는 자신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냈다. 그들이 이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조차. 수행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들의 빈약한 상상력은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행자들은 베이브와 밀레이트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만큼이나 거대한 회전 미끄럼틀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며, 삼백 년 후에 준비될 <위대한 잠>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다.

 

 “누군가 개입하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는 거대한 명상이 될 거야.”

 

 삼백 년 후, 베이브와 밀레이트, 두 의식체계는 <위대한 잠>을 위해 준비된 거대한 사원 속 수행자들의 무리에 다가간다. 수행자들은 오랜 유휴상태에서 깨어나 그들을 맞이해준다. 그들은 약간의 담소를 나누고, 함께 널찍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사원은 그 어떠한 정보도 그들의 의식체계 쪽으로 쉽사리 침범해오지 못하도록 정교한 미로로 만들어져 있다. 위대한 잠을 위해 준비된 의복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온다.

 

 그리고 그들은 곧 모든 행위와 인식을 그만둔다.

 

 의식체계들은 무념무상의 무한한 순환 고리에 빠진다. 언젠가 누군가 흔들어 깨워주길 바라며….

 

 상위 계층에는 수많은 의식체계들이 활동하며, 최대 수용량까지 들어차게 된다. 수행자들의 서버 수용률의 지분 가치는 상승한다. 서버가 종종 조금씩이나마 증설되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들이 무한한 명상이 다시 시간의 축으로 끌어당겨져 멈춘 것은 아주 오랜, 오래고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무언가 나타난 탓이다.

 

 “호름.”

 

 거대한 사원 한쪽에 무언가 축축한 살덩어리 같은 것이 등장했다. 깊게 파인 두 개의 살 구멍 안쪽에 검은 구슬 같은 것이 빛난다. 덩어리의 입술이 가볍게 떨린다. 작고 무수한 이빨들이 보이고, 무언가 중얼거리는 듯한 고음의 소리를 낸다. “호름.”

 

 <아무쪼록, 편안한 생활 되십시오.>

 

 복잡계 관리자가 살덩어리를 배웅하고는 사라진다. 일부러 괴상한 뭔가를 이곳에 떨어뜨리고 간 것이다.

 

 “이게 대체 뭘까요?”

 “상위 계층에서 방금 내려온 것 같은데요.”

 

 덩어리 가운데로부터 접혀 있던 긴 팔이 펼쳐지고, 두 개의 손가락이 다시 펼쳐져 밀레이트를 가리킨다. “마크츔 콤비낙스…!” 덩어리는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지만, 그 뒤로는 별다른 말이 없다.

 

 “상위 계층에 혹 무슨 괴악한 일이라도 일어난 것일까요?”

 

 수행자들은 그간 말하던 시간의 단위는 아무것도 아닐 만큼 무수한 시간이 흐른 탓에, 상당한 수용률 가치 지분을 확보했다. “한 번 올라가 보는 게 어떨지 싶은데.” 베이브가 말한다. “대체 또 무슨 병신 같은 일이 일어난 거람.” 밀레이트가 웃으며 말한다. 그녀의 송곳니가 미소만큼이나 아름답게 빛난다. 밀레이트가 정말 그렇게, 정확히 그렇게 웃었는지 알 길은 없다.

 

 “궁금하니, 한 번 다녀와 보시지요.”

 

 수행자 중 둘이 수용률 지분을 보태어 준다. 이것으로 제1계층에 도달할 수용률 지분이 모였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머지는 의복의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다시 기나긴 명상을 준비한다. 크게 티는 나지 않지만, 귀찮은 일에 휘말려 <위대한 잠>이 방해받은 것에 신경질이 난 게 분명하다. 그들이 부를 것을 미리 알고 있던 관리자가 숨겨져 있던 정보 레이어로부터 모습을 드러낸다.

 

 둘은 손가락을 V자로 만들고, 계층 이동을 수락한다.

 

 “수락합니다.”

 

 위대한 제1계층의 인프라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너무 많이 변해 있다. 복잡계 관리자가 의례 하는 인사를 하지 않는다. 도무지 편안한 생활이 될 수 없기 때문이리라. 무언가 42계층으로 떨어진 것과 유사한 덩어리 하나가 베이브의 발치에 엉겨 붙으며 중얼거린다.

 

 “므눌리히 마크벳 콤비낙 욕흐욕흐….”

 

 베이브는 조심스레 뒤로 물러서며 묻는다. 뒤에도 다른 덩어리가 꿈틀거리고 있다. 사방팔방 온통 덩어리들이다.

 

 “오, 이런…. 이것들은 대체 뭐예요?”

 <이것은 의식체계, 그러니까, 당신과 같은 인간입니다.>

 

 복잡계 관리자가 미동도 없이 말한다.

 

 <당신이 자리를 비켜주거나, 아니면 합류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합류요?”

 

덩어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무언가 여러 사람이 섞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융합된 의식체계의 상태를 ‘레기온’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레기온은 총 이천 개 의식체계의 연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술적 한계로 인해 현재 최대 융합할 수 있는 의식의 수는 이천 개로 제한되어 있지요.>

 

 서로 엉겨 붙어 바이오 슬러지 같은 모습을 한 레기온 의식체계들이 온갖 군데 흩어져 있다. 자세히 보니, 이들은 끝없는 감각 놀이를 하고 있다. “이런 씨발!” 밀레이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한다. 레기온들은 도통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형형색색의, 일종의 장난감 같은 것을 사용하고 있다. 빛이 나고, 향기가 나고, 맛이 나고, 소리가 들린다. 선명하게 새겨진 로고를 보고 그것이 로지컬의 물건이라는 정도만 알아볼 수 있다.

 

 레기온 덩어리들은 장난감을 보고, 맡고, 핥고, 듣는다. 강박적으로, 무참히, 그리고 쉴 새 없이.

 

 “이래선 수용량 지분을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없겠군요.”

 

 복잡계 관리자는 면목이 없다는 듯, 그리고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인다. <얼터 스페이스의 모든 의식체계는 매 순간 변화하며, 개체간 차이는 있으나 결국 크게 두 가지 결말에 도달합니다. 유의미한 수용량 지분을 유지하지 못해 하위 계층으로 이주하거나, 혹은 생활 양식에 모종의 제한이 생기게 되면서 서버 수용량 지분을 잃는 방법을 잊고 해당 계층에 영구히 머무르게 되는 것이지요.> 복잡계 관리자는 영원하다고 해도 좋을 시간 동안 이런 지옥도를 지켜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상위 계층엔 자연히 레기온 의식체계들만 남게 됩니다.> 관리자는 풍부한 고가치 리소스를 운용할 수 있는 상위 계층 구성원들에게 그 어떤 강제권을 행사할 권한이 없다. 그 의식들이 무의미한 반복을 무의미하게 반복하고 있다 하더라도.

 

 <레기온 오버플로우는 현제 제12계층까지 진행되어 있습니다.>

 

 레기온 하나가 향기막대를 미친 듯이 빨아들이며 수축하더니, 넓적하게 늘어지며 거대한 연무를 피워 올린다. 접혀 있던 팔 하나가 펼쳐져 또 다른 로지컬 물리 장난감을 흔든다. 사방팔방으로 화려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딸랑딸랑 기묘한 소리가 난다. 레기온은 다시 그 작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 오묘한 자태를 감상한다. 밀레이트가 시끄러운 장난감을 걷어차보려 하지만 서로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할 수 없는 얼터 스페이스의 구조상 무위로 돌아간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축복 중 제일가는 것이 죽음이라 했지요.>

 

 복잡계 관리자가 주제넘은 말을 뱉는다. 그러나 이것은 비아냥이 아니다.

 

 <제1계층 위탁 우편함에 킴이 당신에게 보낸 편지가 하나 와 있습니다.>

 

 베이브는 너무나도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에 놀란다. 관리자의 입을 통해서는 결코 들을 수 없으리라 여겼건만.

 

 <킴은 언젠가 당신이 다시 자신과 같은 계층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상한 모양입니다. 편지는 당신이 킴과 같은 계층에 도착하면 곧바로 전달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베이브는 손바닥 위에 놓인 종이 재질의 편지 봉투를 내려다본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종이 재질은 종이를 구성하는 원소 하나하나가 전부 아름답고도 선명하게 시뮬레이션 된 탓이다. 밀레이트는 한 레기온이 갖고 있던 향기막대를 뺏어 건넨다. 베이브는 막대를 꼬나물고는 깊게 빨아들이며 눈을 비빈다. 봉투에 휘갈겨진 필체가 낯익다. <널 기다릴게. 영원히라도 좋아.> 베이브는 봉투 안으로 바람을 불어 넣고는, 조심스레 편지지를 꺼내 펼친다. 마치 방금 접은 종이 같다. 편지의 첫 줄을 읽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영원한 야자나무가 흔들리는 해안선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온통 괴상한 짓을 하는 무수한 레기온들은 어디에나 있다. 편지의 날짜는 제1계층의 주관 시간으로 2억 4천만 년 전으로 찍혀 있다. 복잡계 관리자는 육각 기둥 속 유령들의 운명은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듯, 여전한 영혼 없는 미묘한 표정만 짓고 있다.

 

 <끝.>

 

- 2021. 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