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주말장을 돌아다니던 얄리는 한 허름한 가판대 앞에 멈춰 섰다. 얄리의 주목을 끈 것은 굉장히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나무상자로, 거의 거울처럼 번들거리는 표면에는 복잡한 문양과 상징들이 새겨져 있다. 장식들 중 눈에 띄는 것은 다소 기괴한 모습의 소인이다. 상당히 간소화 되어 있었지만, 소인이 거꾸러져 떨어지는 와중에도 악다구니를 쓰며 무언가를 저주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상자 겉엔 다소 투박한 금속 걸쇠가 달려 있는데, 자물쇠만 달면 비상금이나 군것질거리 따위를 정갈하게 숨겨놓기 좋게 생겼다.
얄리는 상인 아저씨에게 4 디지털 달러를 주고 상자를 얻는다. 그리고 곧바로 상자를 열어 비닐봉지에 그득하게 담아 두었던 잡동사니를 쏟아 옮긴다. 뚜껑을 닫으려 애쓰지만, 개중 어머니가 부탁한 플라스틱 머리빗 하나가 뜻을 굽히지 않고 얄리를 방해한다. 일단 어떻게든 닫을 수만 있다면…, 그러다 금세 따닥, 하는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닫혀 버린다.
얄리는 빗이 부러진 것은 아닌지 황급히 상자를 열어젖힌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머리빗뿐 아니라, 나비 모양 딱지와 작은 탱탱볼을 포함해 모든 잡동사니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당황한 얄리는 안을 보기 위해, 그러니까 무어라도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것을 보기 위해 눈을 껌벅인다. 이상한 일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손을 넣어 더듬어 보니 놀랍게도 상자에 마땅히 있어야 할 바닥이 사라져 버렸다. 얄리는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 본다. 사라진 것은 상자의 '안쪽 바닥' 뿐이다. 얄리는 현실감각을 되찾기 위해 상자에 손을 집어넣지만 팔꿈치까지 밀려들어 간다. 얄리는 이리저리 팔을 휘저으며 무어라도 잡을 수 있는 것을 찾아보려 애쓰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다. 상자의 입이 작아 그 이상은 넣어볼 수가 없다. 얄리는 대단히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곰곰이 허공을 응시한다. 그리고 무언가 마법 같은 일에 휘말린 것임을 깨닫고, 흥분감에 고양되어 상자를 안고 집으로 달음박질친다.
얄리는 집에 돌아와 다시 조심스레 상자를 열어 본다. 상자 속은 여전히 공허하다. 어두컴컴하다. 얄리는 뭐라도 보일까 싶어 할아버지가 남긴 연녹색 군용 손전등을 안으로 비춰 본다. 빛은 반대편 표면까지 도달하지도 못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상자 안에서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퀴퀴한 냄새와 함께, 무언가 멀리서 폭주 기관차가 달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얄리는 호기심에 눈과 귀를 번갈아 가져다 댄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얄리는 갑작스레 따귀를 얻어맞은 마냥 강한 충격과 함께 방바닥에 나동그라진다. 상자 안에서 무언가 소인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상자의 바닥 구멍을 통과할 만큼 작다면 작고, 그렇다고 난쟁이 요정이라 하기엔 꽤 큰 놈이다.
“티오 므이곳!”
얄리는 소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소인은 잠깐 망설이더니 손가락을 튕긴다. 손가락 끝에서 불꽃이 튀긴다. 작은 빛 한 조각이 허공을 유유히 가로질러 얄리의 콧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얄리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는 느낌에 숨이 넘어가며 눈을 뒤집고 껌벅인다. 빛 조각은 반대편 콧구멍으로 나와 소인의 검지 끝으로 돌아간다. “그래, 알았다. 꼬마야, 네가 쓰는 언어는 어순이 정말 특이하구나.” 얄리는 다시 도리질을 치고는 눈앞의 소인을 바라본다. 꿈이 아니다.
“두려워 말아라, 꼬마야. 난 기므롯. 네가 뚜껑을 열고 빛을 비춰준 덕에 어디가 출구인지 알 수 있었어.”
녀석의 옷은 본디 아름다운 자수 장식으로 가득했을 것이 보인다. 지금은 보석 원석 몇 개가 매달려 덜렁거리는 남루한 누더기에 가깝지만.
“뭐야, 상자에 갇혀 있었던 거야?”
기므롯은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무한히 확장되는 천장을 가진 역피라미드 사상구조물에 갇혀 있었지. 출구는 단 하나였지만 알아낼 방법이 없었어.” 얄리는 이해할 수 없으므로 못 들은 셈 친다.
“그건 그렇고, 감사의 뜻으로 소원을 들어주마. 난 빚을 지고는 못 살거든.”
얄리는 얼이 나갔다가, 다시 금세 신이 난다. 하지만 침착해야 한다. “소원? 소원 말이지? 몇 개?” 기므롯은 잠깐 자신의 머릿속을 뒤적이듯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V자로 펼쳐 보이며 길다란 송곳니 두 개가 나란히 보이게 웃어 보인다.
“소원 두 개.”
소원 두 개라.
얄리가 소원을 고민하는 동안, 기므롯은 얄리가 대접한 델몬트 오렌지 주스를 몇 모금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기므롯은 요술쟁이로군.’, ‘램프의 요정 지니의 이야기는 사실이었는가 보다.’ 대충 그런 생각을 하던 얄리는 곁눈질을 한다. 남루한 누더기 사이로, 앙상한 등 위로, 거북의 등갑처럼 고이 접혀진 작은 날개가 보인다. ‘이녀석 요정 날개도 갖고 있잖아?’ 상자에서 나올 때도 저 작은 날개로 잘도 날아온 모양이다. 얄리는 고개를 도리질 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소원 두 개라. 얄리는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기므롯을 부른다. “기므롯, 소원이 생각났어. 소원을 백 개로 늘려줘.” 잠시 멈칫한 기므롯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눈을 껌뻑껌뻑, 고개를 갸우뚱한다. “꼬마야,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런 소원은 안 돼.” 얄리는 가슴을 펴고 숨을 들이켜며 자신의 혁혁한 공을 다시 내세운다. “난 널 구해냈어. 너 거기서 얼마나 갇혀 있었지? 말해봐.” “그래, 그래, 대충 2천 년 정도. 그건 고맙다만. 소원이라는 게 그렇게 마구잡이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얄리는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인다. “그럼 하다못해 세 개로 해 줄래?” “꼬마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런 것은 안 돼.” “넌 마법사잖아. 왜 안 된다는 거야. 램프의 요정도 소원을 세 개는 들어 주었단 말이야. 넌 왜 두 개냐구.” 기므롯은 잠시 할 말을 잃는다. 기므롯은 고개를 도리질 치며 훈수를 두듯 말한다. “꼬마야,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앉은뱅이를 고쳐 주었더니 신발을 달라고 한다. 또는, 병자를 고쳐 주었더니 밀린 품삯도 달라 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구나. 거대한 피라미드를 지어 주었더니, 가두어 노예로 부리려 한다. 넌 믿을지 모르겠지만 난 실제로 그런 일들을 정말 많이도 겪곤 했단다.” “뭐야, 인간들이 배은망덕하다 이거야?” “그렇기도 하지만,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려는 우리들의 시도가 항상 무의미했다고나 해야 할까…. 그러니까, 내가 네게 수백 개의 소원을 들어 주어도 넌 금새 행복하지 않을 거야. 심지어 불행할 수도 있고 말이지. 그리고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은 실제로 두 개 뿐이야. 자, 보거라.”
기므롯이 검지 손가락을 눈높이로 치켜들자, 안 그래도 날카로운 손톱이 더 길고 곧게 자라난다. 그리고 얄리의 방 벽지 위에 얇은 팔을 휘저어 동그란 것을 그린다. 엄마가 벽지 망가진 것을 보시면 화를 낼 텐데. “자, 이게 뭐로 보이니.” “공?” “지구란다.” 기므롯은 다시 지구 위에 한 곳에 V자를 그린다. “이게 너다.” 기므롯은 얄리의 반응을 살피지만 시원치 않자 다시 반대편에 V를 또 하나 그린다. “이건 다른 누군가다.” 얄리는 샐쭉해져 어깨를 으쓱한다. “꼬마야, 사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그저 조금씩 서로 다른 가능성을 가진 일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날 뿐이지. 난 그 자리를 조금 바꿔 놓을 뿐이야. 가능하면 사람들이 나쁘다 생각하는 일을, 좋다 생각하는 일로 말이야. 대충 그렇게 설명할게.” 두 개의 V자를 가로질러 몇 개의 일그러진 선이 왕복한 모양새다. 얄리는 납득하기 쉽지 않지만 대강 고개를 끄덕인다.
“네게 소원을 마구마구 들어준다는 건 그만큼 큰 불행이 마구마구 일어난다는 뜻이란다. 거대한 사랑은 거대한 증오를 불러오고, 기나긴 평화는 기나긴 전쟁을 불러오지. 넌 정확히 남들이 불행한 만큼만 행복할 수 있단다. 그래, 그래, 대충 그렇게 설명하면 되겠구나.”
얄리는 기므롯이 더 많은 잔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서둘러 소원을 말하기로 한다.
“좋아. 첫 번째 소원을 말할게. 날 부자로 만들어 줘.”
기므롯은 그동안 무수하고도 무수하게 들었던 식상한 소원에 진절머리가 난다. 부자라. 기므롯은 가느다란 혀로 입술을 축인다. “꼬마야, 부자라는 게 무엇이냐? 재산이 많은 것?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부자를 말하는 것이지? 어디 보자, 그래, 브리트니 스피어스만큼? 아니면 그냥 동네 이장님 정도? 그리고 이건 어른들의 사정이겠지만, 갑자기 네가 부자가 되면 너와 너희 가족은 아주 곤란해질 수 있단다. 부는 분쟁과 폭력, 온갖 불화,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막대한 세금을 불러오게 되어 있어.” “뭐야, 그래서 할 수 없다는 거야?” “그런 소원을 빈 자들은 결국 행복하지 못했단다. 네 깜냥으론 정상적으로 살 수 없을거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거야. 다시 생각해 보면 어떻겠니?” 얄리는 잠시 숨을 고르며 다른 소원을 생각해 본다. 모르겠다. “그럼 날 아주 강하게 만들어 줘. 그래, 마이티 파워맨 만큼.” 얄리는 잽싸게 만화책을 한 권 가져와 내민다. 기므롯이 만화책을 몇 장 넘겨 본다. “꼬마야, 네가 하루아침에 2미터 키의 근육질 사나이가 된다면, 그 비밀을 알아내고 싶은 사람들이 널 찾아낼 거야. 그리고 널 해부할 거란다. 그러려는 과정에서 네가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건 두말할 것도 없고. 미안하지만 난 그런 소원은 들어줄 수 없어.” “그럼 날 판타스틱 라이트닝처럼 빠르게 해 주던가. 안 잡히면 되잖아?” 라이트닝은 파워맨의 조수로, 바로 옆에 그려져 있다. “네가 그렇게 빨라졌다간 상대론적 효과로 나타나는 부작용들은 둘째치고 주변 주택이며, 마을이…. 아니 됐다. 그건 그냥 안 돼.” 얄리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꼬마야, 일단 내 얘길 들어 봐. 똑똑해지는 것은 어떻겠니?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족장이나 왕들은 그런 소원을 빌었단다. DNA 수준에서 아주…, 무진장 똑똑해져 버렸지. 사실상 너희 문명은 우리가 이 세상에 심어 둔 그 왕들의 씨앗에서 시작된 거란다. 그리고 넌 일단 현명해진 다음 두 번째 소원을….” “난 이미 똑똑해. 반에서 세 번째로 성적이 좋지. 그렇게 소원을 낭비하고 싶진 않아.” “아, 그래. 그럼…, 계속해 봐라.” 얄리는 다시 한참을 골몰한다. “아, 정말 모르겠단 말야. 뭔가 날 아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소원이….” 얄리가 턱을 괴고 공상을 펼치는 동안 다시 혼자가 된 기므롯은 가만 쪼그려 앉아 나무 바닥의 오묘한 무늬를 구경한다.
기다리다 지쳐 얄리의 공부책상에 꽂힌 두꺼운 책들을 탐독하던 기므롯이 길다란 코를 긁는다. “그냥 나중에 다시 올까?” 얄리가 손사래를 친다. “아냐, 아냐, 잠깐만 기다려봐.” 얄리는 도무지 알 수 없다….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고민해도 도통 모르겠다. 영원히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마법의 크림빵을 달라고 하면 어떨까? 아니다. 이런 소원으론 후회할 것이 분명하다.
기므롯이 쩝 소리를 내며 가만히 자세를 고쳐 앉는다.
“한 때, 온 세상을 평화롭게 하고자 한 사나이가 있었다. 니가 좋아하는 마이티 파워맨 만큼이나 말야.”
얄리가 잠시 공상을 멈추고 기므롯을 바라본다.
“사내가 이루고자 한 것은 단 한가지였어. 이 세상 사람들이 서로를 돕고 사랑하도록, 그래, 뭐랄까, 메세지를 남기는 것. 수천 년이 지나도 전해지도록 말야. 그야말로 러브 앤 피스지.”
“그래서?”
“그 사나이는 자신의 행하는 바를 기록해줄 사람들을 모집했다. 그리고 엄청난 기적을 부리기 시작했지. 모두가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고, 그의 말을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은 전부 할 수 있었지.”
“네가 소원을 들어준 거구나?”
“그래, 하지만 그렇게 마법을 마구 부렸다간, 의도가 뭐든 간에 금방 몰매를 맞거나, 심하면 죽임을 당하는 게 예삿일이거든. 내가 소원을 들어주지 않자, 그 친구는 40일 동안이나 단식 투쟁을 했다. 난 결국 항복했지. 중간에 장난을 좀 친게 뭔가 오해가 있어서 그만 그 친구의 똘마니들에게 사악한 악귀로 치부된 것 같다만….”
“결국 밑도 끝도 없이 주변 사람들을 위해 수상한 마술을 너무 많이 부리다 보니 그 지역 유지에게 잘못 걸려 죽임을 당했고, 나도 소동이 다 끝나고 벌을 받아 요술 감옥에 갇혔지.”
기므롯은 발가락 끝으로 나무 상자를 툭 친다. 얄리가 흠칫 놀라며 일어선다.
“야, 잠깐만, 왜 그 사람은 소원을 많이 빈 거야? 난 두 개고 말야.”
“그땐 상황이 좀 달랐다. 어떤 미친 왕이 그 동네에서 갓 태어난 아기들을 마구 죽였거든, 왕이 태어날 거라는 예언에 말야. 그래서 난 그 친구에게 소원을 많이 들어줄 수 있게 됐어.”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기므롯은 앙상한 손을 뒤로 뻗어 날개를 긁적인다. 날개죽지가 시원하다는 듯이 파르르 떨린다.
“얄리, 넌 꿈이 뭐니?”
“난, 노래 부르는 게 좋아. 가수가 될 거야. 아버진 내가 외과 의사가 되길 바래.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노래야.”
기므롯이 얄리의 눈을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얄리가 씩 웃는다.
“그래, 좋아, 정했어. 첫 번째 소원으로는 내 노래 실력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어 줘. 랩, 발라드, 락 앤 롤, 뭐든 가능하게. 이정도는 소원 하나로 커버 가능하겠지?”
기므롯은 잠시 짱구를 굴려 본다. 갑자기 노래를 굉장히 잘 하게 된 꼬맹이라…. “어, 뭐… 그래. 알겠다. 문제는 없을 것 같아.”
기므롯의 검지 손가락 끝에서 작은 빛 알갱이가 피어오르더니 아주 천천히 떠올라, 놀라 떡 벌어진 얄리의 입 안, 목구멍 밑으로 사라진다.
“뭐야, 된 거야?”
얄리는 자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명을 빽 지른다. “야, 내 목소리가 왜 이래?” 얄리의 새된 목소리는 일종의 천상의 목소리가 되었다. “꼬마야, 기존 네 성대 구조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발성이 불가능해. 내가 적합한 구조로 바꿨어. 처음엔 좀 익숙하지 않겠지만….” “야, 되돌려 놔. 다시 원래대로!” 얄리가 와락 다가와 기므롯의 앙상한 어깨를 확 밀친다. 기므롯은 아래 턱을 쭉 늘렸다 고쳐 닫는다. 그들만의 제스쳐로 '돌아버리겠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 그게 네 두 번째 소원이라면.” 기므롯이 손가락을 튕기자 다시 빛 알갱이가 얄리의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작은 어금니를 툭 치고 빠져나와 기므롯의 검지 위에서 홀연히 사라진다. “야, 잠깐만. 방금 건 아냐.” 얄리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원래의 새된 목소리로 돌아왔다. 그저 평범한 꼬마의 모습으로.
“꼬마야, 만나서 반가웠다. 더이상 빚진 건 없는 것 같구나. 구해줘서 고마웠고. 난 그럼 이만 가보마.”
기므롯이 주섬주섬 주변을 정리한다.
얄리는 분노한 어린이 특유의 순수한 증오가 그득한 숨을 몰아쉬더니 결국 참을성을 잃고 델몬트 병을 집어 던진다. 기므롯은 두부에 델몬트 병에 맞고 깨진 유리와 함께 구석으로 나동그라진다. 얄리는 쓰러진 기므롯 위로 뛰어올라 그 작은 소인을 꽉 졸라버리려 한다. “이런, 엿 같은 애새끼가!” 기므롯은 작은 날개를 활짝 펼친 반동으로 고사리 같은 손가락 사이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양손을 펼쳐 얄리를 순식간에 불타는 스파게티 면발처럼 만들어 버린다. 얄리를 이루던 무수한 입자들은 얄리의 육체와 정신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드라마틱한 재배치를 이루어낸다. <얄리 면발>은 점차 거미줄처럼 가늘어지더니, 기므롯의 길다란 중지 손가락 끝에 난 작은 검은 점의 모공 사이로 빨려 들어간다. (이 희귀한 광경을 목격하고도 살아남은 혹자들은 이곳을 <요정의 소원 주머니>라고 부른다.)
한바탕 소란을 듣고 달려온 얄리의 부모님은 얄리의 방 전역에 산산조각으로 깨져 흩어진 델몬트 오렌지주스 유리병과 바닥에 흥건한 오렌지 주스와, 괴상한 나무 상자와, 수수께끼의 소인을 발견하고는 당황한다. 기므롯은 펼친 날개를 고이 접고는, 목을 가다듬는다.
“아…. 저, 실례합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전, 기므롯이라고 합니다. 얄리 부모님 되시나요.”
얄리 아버지는 문지방을 짚고는 눈을 껌뻑이며 안경을 고쳐 쓴다. 얄리 어머니가 가까스로 입을 뗀다. “그, 그렇소만?”
“죄송하지만, 얄리 군은 더이상 이 세상에 없습니다.” 기므롯은 짐짓 공손히 예를 표한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두 분, 사죄의 의미로 소원을 들어 드리지요.”
기므롯은 소원이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번뜩이는 눈을 너무도 많이 보았다. 네 개의 눈동자가 기므롯의 등쪽으로 향한다. 작은 날개가 파르르 떨린다.
“소원이요…?”
“어디 보자, 그러니까….”
“세 가지 소원을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기므롯은 앙상한 손가락 세 개를 나란히 펼쳐 보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