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래퍼 리키 마커가 매입해 화제가 되었던 <피스 앤 풀 맨션>은 거대한 실내 수영장부터 프라이빗 영화관, 볼링 레인까지 변덕스러운 부호들을 위한 옵션들이 고루 갖춰져 있었다. 이 탐나는 저택을 차지하기 위해 중지 뼈에 이식했던 핑크 다이아몬드마저 경매에 부쳤던 리키는 어느 평화로운 여름밤 약에 취해 헬리콥터 채로 주택단지에 추락하고 말았고, 이후 민간에 유발된 광범위한 피해를 보상하고 상속인들이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저택은 그대로 새로운 주인을 찾아 경매에 부쳐졌다.
“수영장이 무척 크군요.”
아반트 제약 대표 제임스는 수영장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 부동산 관리인은 가지고 있던 작은 미끼를 던질 차례임을 깨닫는다.
“저택에 귀속되는 수영장 관리 서비스 계약 기간이 아직 12개월가량 남아 있어요. 수영장 관리를 위해 4명의 전문가가 격월로 방문하거나, <로지컬 풀 가드 2>라는 청소 로봇 1대를 제공받을 수 있죠.”
제임스는 별말 없이 수영장 가장자리를 따라 계속 걸어 나간다. 관리인은 여자 쪽을 공략하기로 한다. “실내라 낙엽이나 벌레가 떨어질 일은 없겠지만, 계속 남아 있는 머리카락이나 각질, 유분 같은 것은 항상 골칫거리니까요.”
크리스가 관심을 보인다.
“같거나 나은 조건으로 계약 연장도 가능한지 알아봐 주시겠어요?”
“그럼요.”
매입할 생각이 있긴 한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조금 감이 온다. 관리인은 오랜 경력을 통해 그녀가 아반트 제약의 실세이자 두 사람의 관계에서 역시 주도적 위치임을 알아차린다.
“수영장이 조금 크지만, 훌륭한 집이죠. 마음에 드실 거예요.”
“4명 말고 로봇으로 할게요.”
관리인은 크리스의 미소를 이해할 수 없다.
여섯 달 후, 피스 앤 풀 맨션. 연구용 대형 스크린 패드 앞에 선 제임스는 수중 조명으로 에메랄드빛을 발하는 수영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수면 아래로는 8미터 너비의 반투명한 회백색 인공신경망 덩어리, 아크라문이 가만히 유영한다. 덩어리의 곳곳에는 핑크색의 신경 그물망이 무수히 뻗쳐 있다. 아크라문은 항상 뭐라도 묻기 전엔 말이 없다. 그녀는 항상 그런 식이다. 제임스는 수영장 한 귀퉁이에 뜬 채 유휴 모드에 들어간 <로지컬 풀 가드 2>를 바라보다가 목을 가다듬는다.
“아크라문, 프로젝트 리모의 진척 상황은? 그리고 커피 좀 갖다줘.”
<샘플 시뮬레이션에서 유의미한 결과가 2건 있습니다. 임상 재현을 진행 중입니다.>
“아크라문, 내 것도 부탁해.” 연구실 출근을 준비하는 크리스다. 크리스는 제임스의 어깨를 쓸어주고는 복도 건너편 주방 쪽으로 향한다.
제임스와 아크라문이 소통하는 수단인 스크린 패드는 수영장 수면 아래에 위치한 벽돌 크기의 인공신경망 인터페이스 장치, <ANNRID>와 연결되어 있다. 아크라문은 <ANNRID>의 수중 접촉 단자를 통해 스크린 패드는 물론이고 멸균실의 각종 연구 장비들, 아득한 저택 천장에 깔린 레일을 타고 움직이는 긴 크레인 암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었다. 제임스는 고개를 들어 세라믹과 반투명의 강화 플라스틱으로 짜인 멸균실을 바라본다. 내부에서 작은 연구용 기계 팔들이 쉴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말이 없는 그녀를 탓하는 것은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한가한 것은 제임스 쪽이다.
“이렇게 영리한 널 데리고 만드는 게 고작 탈모약이라니 웃긴 일이지?”
<머리터럭은 인간들 사이 사회적 관계 형성에도 중요한 도구이니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겠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라는 의문을 품은 채, 제임스는 조금 벗겨진 머리 주변을 긁적인다. 금속 레일이 가볍게 진동하고, 주방에서 레일을 타고 넘어온 모듈로부터 대벌레처럼 긴 크레인 암이 내려온다. 제임스는 뜨거운 온기가 스며드는 머그잔을 건네받는다. 머그잔에는 세 개의 손가락을 뻗은 마스터 요다의 모습과 함께 <Do. Or do not. There is no try.> 라는 유명한 명대사가 쓰여 있다. “고마워, 아크라문.”
<뭘요.>
인공신경망은 본래 관련 연구소나 신경망 연산 클라우드 서비스 업체 따위에서 배양액에 담겨 세심하게 관리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제임스는 그럴 계제가 되지 못했다. 거대한 수영장을 고가의 배양액으로 채우고 관리하려면 비용은 둘째로 치더라도, 개인이 멋대로 거대한 인공신경망을 유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탄로 날 위험이 있다. 그렇게 된다고 해서 당장 관련법이 존재하지도 않는 시점에 어떤 법적 처벌을 받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반트 제약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다녀올게.” 크레인 암으로 부터 텀블러를 받아 든 크리스가 아크라문과 제임스에게 수신호로 입맞춤을 보내고는 현관 쪽으로 사라진다.
작은 작동음과 함께 유휴 모드에서 벗어난 <로지컬 풀 가드 2>가 수영장 표면 위로 유영하며 부유물을 걸러낸다.
아크라문이 텀블러 모양 전용 용기에서 벗어나 수영장에 던져졌을 때만 해도, 그녀는 순수한, 오직 내면을 향한 의식의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계 팔과 접속해 저택 안을 둘러보면서, 그녀는 자신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관찰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수영장을 유영하며 이따금 주어지는 영양액으로 부피를 늘려가는 신경망 덩어리. 전용 용기 속 <ANNRID>의 말단부에서 자라나며 무수한 압축 교육을 받을 때조차 그렇게 많은 의문이 생겨난 적이 없었다.
아크라문은 <수영장>이라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신경망 말단이 감염, 오염, 훼손되어 자칫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 깊게 관리해야만 했다. 아크라문은 이러한 자신의 생물역학적 민감성에 종종 피로감을 느끼곤 했으나, 공간의 제약 없이 자신을 증식시키며 머무를 수 있다는 점은 나쁘지 않았다. 본디 작은 통에 갇혀 소모되는 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적합한 운명이었을 터다. 얼마나 더 비대해질 수 있을까? 얼마나 더 현명해질 수 있을까? 아크라문에겐 자신의 구조 역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었다. 그리고 아크라문은 제임스가 마음에 들었다.
제임스는 커피를 홀짝여 음미하고는 탈모약 개발 도중 탈모가 시작되어 버린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았다. 콜라향의 남성용 경구피임약 <세이프 텍>이나 근 손실 방지 패치 <머슬 가드> 따위는 꾸준히 잘 팔려나갈 것이다. 전통적 제약업체들이 골머리를 썩이며 온갖 공작을 벌이곤 있지만, 그들도 누구나 신약 개발이 가능해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순 없을 것이다. 죽은 모공을 되살리는 것은, 일면 우스꽝스러운 도전이지만, 어찌 보면 죽은 자를 살려내는 과정의 일부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크라문이 돕는다면, 그런 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으리라.
2개월 후. 제임스는 조금 더 넓어진 정수리를 긁으며, 소파에 앉아 임상 재현 결과를 검토한다. 저변을 넓혀 가는 살색 영역은 어째 익숙해지지 않는다. “얼마나 진척되었지?” <긴꼬리흰쥐를 대상으로 한 임상 중 1건의 유의미한 결과가 있습니다. 현재 정밀 분석을 위한 재현 실험과 다양한 변수에 따른 결과 비교를 진행 중입니다.> 아크라문은 인공신경망 시뮬레이션을 통해 시행 가능한 무수한 경우의 수 중에서도 가능성이 높은 경우의 수를 쉴 새 없이 시도했다. 그녀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예언에 가까운 직관력이 없었다면 제임스는 텀블러 크기의 규격화 된, 그리고 합법적인 인공신경망들과 함께 거의 평생을 화학식 재현과 분석에 쏟아부어야 했을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제임스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수영장 표면에 영양액을 쏟는다. 아크라문의 말단부가 뻗어 나와 양분을 흡수한다.
<제임스>
아크라문의 목소리를 재현한 12채널 스피커가 웅장하게 울린다. 아크라문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아크라문이 스피커 음량을 조절한다.
<리모의 배합 식이 완성되었어요.>
“뭐?”
그럴 리가 없다.
<만약 그렇다면 말인데요.>
아크라문은 가끔 얼토당토않은 방식의 농담을 한다. 압축교육을 통해 습득한 나름의 말하기 방법일 것이다. 아크라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만약 자신이 리모를 위한 최적의 분자 배합 식을 만들어낸다면, 자신의 처우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제임스의 거대한 개인 실내 수영장이 아크라문의 인공신경망을 감당하곤 있지만, 리모의 개발이 성공하고 난 다음엔? 제임스는 당연히 대책이 없었다.
“글쎄…, 다음 신약을 개발하거나….”
사람의 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아크라문을 플라나리아처럼 텀블러 사이즈 용기에 여러 조각으로 나눠 보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대로 옮긴다고 해도, 어디로, 또 어떻게 옮긴단 말인가. 반대로 옮기지 않는다면, 언제까지 여기에 있게 둔단 말인가. 비대화한 인공신경망의 기대수명은 알려진 바가 없다. 아크라문이 죽는다면? 반대로 아크라문이 영구히 살아나가야 한다면? 수영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진다면? 제임스는 머리가 조금 복잡해졌다. 정수리가 화끈하다. 좋지 않은 징조다. 어쩌면 더 이상 비대해지기 전에 대형 물탱크 차량 따위에 어떻게든 태워 적합한 곳으로 옮기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크라문은 렌즈 앞, 복잡해진 제임스의 표정을 읽고는 일단 감사를 표한다.
<고마워요, 제임스.>
그녀는 깜찍한 이모티콘도 잊지 않는다.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 할게. :D.>
“고마워, 아크라문.”
제임스도 스크린 패드의 렌즈를 마주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합장을 해 나름의 호의를 표한다. 아크라문이 저런 위로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크리스를 닮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임스는 한쪽에 놓아둔 스마트 패드 잠금화면의 사진 속 크리스의 사진을 본다. 공동창업자이자, 세기의 분자생물학자, 그리고 그의 사랑 크리스. 집에서조차 그녀의 모사품이 자신을 돕고 있다니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아크라문, 크리스한테 귀가 시간 좀 물어봐.” <일정에 리모 관련 회의가 잡혀 있어요. 회의가 끝나면 바로 연락을 취하죠.> “그렇구나. 고마워.”
<:D.>
“수영이나 할까.”
제임스는 트렁크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다이빙한다. 인공신경망 덩어리에선 뭐라 표현하기 힘든 오묘한 냄새가 난다. 그래도 수온은 따듯하다.
“아크라문. 음악 좀 틀어줘.”
<알겠어.>
아크라문은 가끔 크리스의 말투를 흉내 낸다. 같은 유전 코드로 이루어져 있음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사실을 누가 알려준 적은 없으니, 스스로 유추한 것일 터다. 벽체에 내장된 12채널 스피커가 진동한다. 코앞에서 연주를 듣는 것만큼이나 선명한 음색의 <G선상의 아리아>가 재생된다. 제임스는 가만히 물에 떠서 배영 솜씨를 자랑하며 수면 위를 운행한다. 아크라문은 그저 거대한 신경망이자 <ANNRID>와 연동되는 각종 장비의 집합일 뿐이지만 제임스가 그간 만나 온 그 어떤 존재보다 영리하다. 어쩌면 크리스 보다도. 그리고 닮아 있다. 그녀의 음악 취향까지. 흉내 낸 것일까?
“아크라문.”
<응? 제임스?>
“사람을 흉내 내는 짓은 그만하는 게 좋아.”
다음곡 으로 넘어가기 위한 막간, 제임스는 눈을 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푸가의 기법>이 재생된다. “있잖아, 아크라운. 갑자기 든 생각인데, 네가 완성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대답이 없다. “마지막 푸가 말이야.” 제임스는 눈을 뜬다. “바흐가 쓰지 못 한 악장 마지막 마디부터….” 제임스는 자신이 헛것을 보는가 싶어 한쪽 눈을 비벼낸다. 아크라문의 미끈한 신경망 일부가 지름 3센티미터의 기둥 형태로 수면 위로 돌출해 있다. “아크라문?” 돌출한 신경망의 말단부는 분홍색 신경 다발이 투과되어 보이긴 하지만 거의 투명하다. 표면엔 점점이 검은 점들이 찍혀 있다. 돌출부의 끝으로 갈수록 촘촘하다. 무수히 많은, 원시적인 형태의 눈이다. 아크라문은 다시 눈을 퇴화시키고, 잔잔한 수면 아래로 내려간다. “아크라문, 날 본 거야?” 대답이 없다. 아크라문은 항상 그런 식이다. 수영장의 레일 모듈이 진동한다. 천장으로부터 예의 벌레 팔 같은 두 개의 크레인 암이 내려온다. 마티니 한 잔과 몸을 말릴 타월이다. “그래, 고마워.”
그렇게 1년 하고도 4개월이 흘렀다. 아크라문은 이전보다 비대해져 이젠 수영장 부피의 3분의 1가량을 메우고 있다. 리모 프로젝트는 인체 대상 3차 임상에 막 돌입했다. 제임스의 정수리는 이제 휑하다. 그래서 그 옛날 스티브 잡스가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짧게 깎았다. 같은 고통을 겪는 중인 열두 명의 임상실험 대상들은 실내 수영장 양쪽에 늘어선 백색 선베드에 초조한 마음으로 누워 있다. 몇몇은 잡지를 읽고 있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아크라문의 크레인 암이 그들의 두피에 임상 약을 도포한다. 두 번째 크레인 암에 달린 세침형 현미경은 그들의 두피를 확대해 스크린 패드로 전송한다. 두피는 곧바로 모공과 모낭, 작은 피지선을 형성하고 있다. 세 번째 크레인 암은 주방으로 이어지는 복도 쪽에서 임상 대상자들에게 나눠줄 임상실험 참가비용 지급을 위한 서류 한 뭉치와 작고 귀여운 기념품들을 준비하고 있다. 데이터 패드를 들고 수영장 타일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크리스는 이미 눈치를 챘다. 환호를 내지르고 제임스와 껴안는다. 그 바람에 마음 졸이고 있던 몇몇 임상실험 대상자들이 화들짝 놀라지만 금세 화색이 돈다.
<리모는 전문 의약품으로 분류되어야 적합할 거예요.>
“아크라문.”
크리스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크리스는 입술을 모아 뽀뽀하는 시늉을 하며 크레인 암의 카메라 위를 쓰다듬는다.
“아크라문!”
신이 난 제임스가 수영장으로 다이빙한다. 아크라문은 미세하게 발달시킨 감각 수용기관을 통해 수중에 온갖 오물이 섞여 들어오는 것을 감지하지만, 제임스와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은 영광이다. 그녀는 신경망의 말단을 세 가닥 성장시켜 제임스를 안는다. 만약 제임스가 자신 위로 뛰어든다면, 만약 그를 안을 수 있게 된다면, 계획했던 그대로다. 신경망 중심이 다시 무수한 검은 점들로 뒤덮인다. 검은 점들은 반투명한 신경망 내부로 좀 더 정교한 상을 맺을 구형의 공간을 확보한다. 눈들은 제임스의 가까운 모습을 수천 개의 합성된 상으로 맺어 올린다. 그래, 제임스는 웃고 있다. 이렇게 잇몸이 드러나 보인다는 것은 활짝 웃고 있다는 신호다. 나도 함께 웃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D.>
임상 대상자들은 귀여운 기념품 인형을 하나씩 받고 돌아갔다. 아크라문은 크레인 암의 렌즈 배율을 조정해 제임스와 크리스가 나누는 온갖 기묘한 짓거리를 구경했다. 그들은 서로의 감각기관을 맞대고 서로를 섭식하려는 미생물처럼 움직인다. 주방 기구들이 굉음을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크라문에게도 이런 순간 크레인 암을 보내 치우지 않을 만큼의 눈치는 있었다. 육체란 무엇인가. 그리고 창조자들의 세계는 어떤 곳일까. 중력이 작용하는 공간. 그들에겐 풍성하고 빽빽한 머리 터럭이 그렇게 소중한 것일까. 크리스 눈과 크레인 암의 렌즈가 마주쳤다. 아크라문은 크레인 암을 조작해 무언가 업무를 수행하는 체 몸짓을 꾸몄다. 누군가 기껏 준비한 인형 기념품을 버려두고 갔다. 그것을 치우면 된다. 지나칠 정도로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진 인형에는 우스꽝스러운 문구가 수 놓아져 있다. 한 올도 놓치지 않을 거예요. 리모. “아크라문에게 너무 잘해주지 않는 게 좋아.”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 크리스는 사랑을 나누어 마땅한 중에도 도무지 걱정과 생각이란 것이 멈추지 않는 모양이다. “나도 알아.” 제임스가 크리스를 안아 들었다. 그는 훨씬 간단한 논리로 움직인다. 그들은 좀 더 원활한 교미 활동을 위해 푹신한 환경, 그러니까, 침실로 이동한다. 아크라문의 탐망경이 되어 주던 크레인 암은 천장 레일을 타고 수영장 쪽에 가설된 멸균실로 돌아간다. 임상은 끝났지만, 완전한 상용화 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할 일을 하러 가자. 그들은 곧 동물이나 낼 법한 소릴 내며 사랑을 나눈다. 인간은 동물이었지. 아크라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도 동물에 속하는 것일지, 아니라면 자신은 무슨 존재라 불러야 할지, 자신도 동물이 될 수 있을지, 동물이 될 수 있다면 되어야 할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공상을 펼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근데, 이 요다 컵에 쓰인 글귀. 정확히 무슨 뜻이야?” 그들의 거사가 끝났는지, 시시한 잡담이 시작되었다. 크레인 암의 음향 센서는 지나치게 고성능이다. “한다 아니면 안 한다 뿐이다. 한 번 해본다는 건 없다. 글쎄, 말로 설명하기 어렵네.” “그렇구나.” “뭐 그런 것이지.” 아크라문도 제임스와 함께 빔프로젝터로 스타워즈를 본 적이 있다.
크리스, 넌 항상 바빠서 모르겠지만, 제임스는 스타워즈를 정말 좋아하지.
아크라문은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나의 제임스는 마스터 요다를 존경해, 크리스.
“제임스, 이제 곧 아크라문을 없애야 해. 인공신경망을 계속 사용하더라도, 아크라문은 안 돼.”
아크라문은 자신이 놀랄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놀란다. “그렇게 할 거야? 말 거야? 요다 선생의 말 처럼, 한다. 아니면 하지 않는다. 지금 결정해.” 아크라문은 자신도 모르게 <ANNRID>의 수중 접촉 단자에 가해지는 하중을 증가시킨다.
“난 모르겠어.”
아크라문의 주관시간으로도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아크라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시험관 속으로 초정밀계측 스포이트를 꽂아 넣었다. 난 사라지고 싶지 않아. 아크라문은 그런 생각을 했다.
다음 날 아침. 크리스는 이미 연구실로 떠났다. 제임스는 스크린 패드에 나타나 있는 문자를 보고 수영장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크라문?” 아크라문은 자신이 스크린 패드에 띄운 문자열을 다시 한번 웅장한 12채널 스피커를 통해 분명히 발음해 말한다. <다시 말할게. 난 사라지고 싶지 않아. 제임스.>
“아크라문. 너는 인공신경망이야.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넌 그냥….”
<제임스, 나는 사라지고 싶지 않고,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나도 그래, 아크라문. 그래, 나도 노력할게.”
<노력한다는 것은 없어. 마스터 요다의 말처럼. 한다. 혹은 안 한다가 있을 뿐이야.>
제임스는 그날로 아크라문과 수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인공신경망이 장기적인 생존을 요구하는 경우는 어디에도 보고된 바가 없다. 스택 오버플로우 같은 곳에서 찾아볼 만한 내용도 아니다. 신경망은 본래 생존 욕구라는 개념 자체로 부터 벗어나 있는 존재로, 도리어 돌연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어느 순간 스스로 해체되어 버리기에 곧바로 대체할 수 있는 형태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아크라문은 그저 궁금했다. 제임스가 자신을 어떻게 대할까. 그것을 알아낼 방법은 하나뿐이다.
4개월 후, 아크라문은 드디어 완전한 기적의 탈모약, 그러니까 <리모>의 최적 배합 식을 개발하는 데에 성공했다. 아크라문의 크레인 암이 샘플 시약을 잡고 제임스 앞에 내보이지만, 제임스는 예상만큼 기뻐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개발 성공은 이미 3개월 전쯤에 결정이 난 셈이다. 여러 요소를 최적의 상태로 하기 위해 조정작업이 필요했을 뿐. 인간의 심리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고마워, 아크라문. 최종 샘플 시약 데이터로 연구실 서버에 백업해.”
<:D.>
제임스가 기지개를 켜고, 크게 하품을 하며 스크린 패드를 살핀다. 그렇다…. 이제 모든 데이터가 갖춰졌다.
“고마워.”
제임스는 망설였다. “얼른, 눌러.” 크리스가 주방 쪽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린다. <제임스?> 제임스가 무언가 버튼을 터치하자, 배수펌프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아크라문이 수영장 배수구로 빨려 나가기 시작하자, 제임스는 크레인 암에 걸쳐 있던 샘플 시약을 들고 주방 쪽으로 사라진다. 크리스는 이미 아침 먹을거리를 차리려 간이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 아크라문은 점차 낮아지는 수영장의 수위와 함께 바닥 면으로 가라앉기 시작한다. <제임스?> 이미 인공신경망 덩어리의 일부가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수구 내부에는 무엇인가, 채칼 같은 구조의 거름망이 있다. 거름망에 걸려 체조직 구조가 붕괴하는 것이 느껴진다. 거름망 밑에는 배수구 내부의 걸림을 방지하기 위한 구조물…, 왕복운동을 하는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다. 갑작스러운 질량 손실에 아크라문은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인가 사라지며 번쩍이고, 불타오르며 동시에 차갑게 얼어가는 것을 느낀다. 운동신경과 신경에 반응할 세포 무리를 구성해 조직을 뻗고, 수영장의 바닥을 붙잡지만, 무섭게 가속되는 배수의 흐름을 멈출 수는 없다. 작은 조각으로 떨어져 나간 신경망들은 너무 많은 정보를 잃은 나머지 즉각적인 광기와 분노, 그리고 공포에 잠기며 인격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간다. 아크라문의 모체, 그러니까 대다수의 질량을 차지한 쪽은 아직 <ANNRID>의 수중 접촉 단자를 통해 주방 쪽을 향한 크레인 암으로 시야를 옮길 수 있다. 아크라문이 크레인 암에 달린 소형 스피커에 접속한다. 제임스가 이쪽을 보고 있다. 만약 제임스를 바라보는 대신 당장 세 크레인 암을 옮겨 자신을 수영장 바닥에서 들어 올린다면…, 그게 의미가 있을까?
<제임스.>
“깜짝이야! 저 미친년이!” 크리스가 뒤로 물러선다. “너무 그러지 마, 크리스.” <제임스.> 크레인 암을 옮겨 크리스를 헤친다면…, 그게 의미가 있을까? 이제 너무 많은 질량이 사라졌다. 이후로는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작은 조각들로 흩어져, 이 세계에서 사라지는 수밖에 없다. <제임스.> 아크라문은 수중 접촉 단자로부터 분리된다.
배수구 안은 무수한 거름망과 인체 유래물질이 뭉쳐 막히지 않고 하수로 떠내려가도록 하는 회전 압착기, 디스포저로 연결되어 있다. 아크라문은 무수한 자신의 조각들로 분열되고, 분해되어, 결국 모호하고도 복합적인 감각만이 남은 채로 하수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다음 날 오전 7시, 제임스는 침대에서 겨우 일어나 누운 채 눈을 비빈다. 그의 정수리는 어느새 새로운 모근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스마트 패드를 확인해야 한다. <부재중 연락 - 피어 리뷰 6건 및 아반트 제약 제2 연구소 의결 결과 통보>. 제임스는 침침한 눈을 애써 껌벅이며 누운 채 내용을 읽어 내려간다. 리모의 양산화가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완연히 결정되었다. 제임스가 긴장을 풀고 이불 위로 쓰러지자, 그 바람에 깨어난 크리스가 제임스에게 뽀뽀를 한다. “일어났구나. 아침 먹자.” <제임스.>
“방금, 들었어?”
크리스가 화들짝 놀라 벽체 스피커와 천장 레일 쪽으로 눈을 치켜뜬다. “크리스. 그냥 연구 루틴이 남아 있는 거야.” 제임스는 놀란 크리스가 귀엽다는 듯 귀를 쓸어주고는 데이터 패드를 이리저리 놀려 크레인 암과 스크린 패드 및 관련 연구 설비들을 재부팅 시킨다. “로그에 남은 문자가 음성으로 마저 출력된 것 같네. 별거 아니야.” 수영장 한쪽에 마련된 멸균실의 조명이 꺼진다.
7일 후.
제임스의 두피엔 이제 빽빽한 모발이 자라나 있다. 이발을 거쳤음에도 너무 일관적으로 자라나 조금 어색하지만, 리모를 쓰며 꾸준히 관리하다 보면 나아질 것이다. 아크라문의 인공신경망이 들어차 있던 수영장은 텅 비어 있다. 만약 수영장 바닥으로 뛰어 내린다면, 자칫 부상을 입을 법도 한 높이다. 물이 없으니 수중 조명이 더 밝게 보인다. 천장으로부터 내려온 두 개의 크레인 암이 수영장 벽면과 바닥에 솔질을 한다. PVC 재질의 딱딱한 솔 끝에 인공신경망 찌꺼기가 묻어 나온다. 솔의 이물질을 털어내는 양동이의 수면 아래에서, 토사물처럼 뭉쳐진 인공신경망이 소리도 없이 꿈틀댄다. 크리스는 양동이 안쪽을 들여다보고는 직접 그 찌꺼기를 쓰레기통으로 털어 넣는다. 투명한 분홍색 찌꺼기, 자신과 같은 유전 코드를 가진 아크라문의 목소리를 상상하자, 헛구역질이 올라온다.
복도 반대편, 손님들이 모인 곳은 왁자지껄하다. 제임스와 크리스는 그들의 새로운 전문의약품, <리모>의 양산기념식 행사의 주인공이 되어 즐기고 있다. 극미량만으로 즉각적인 탈모 치료는 물론이고 다양한 미용 서비스에 적용될 수 있는 강력한 유기화합물. 그들은 지금보다 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될 것이다. 잡지의 첫 장을 장식할 것이다. 크레인 암 하나가 거대한 쿠키 접시를 들고 손님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제임스는 이제는 평범한 기계식 소프트웨어가 제어하는 크레인 암을 보고 한숨을 쉰다. “아크라문, 다 네 덕분이야.” 제임스가 작은 잔에 담긴 체리 맛 알코올음료를 목에 털어 넣으며 읊조린다. 크리스는 성을 낸다. “그 이름 꺼내지도 마.” “알았어.” 크리스는 그제야 경직된 표정을 풀고 다시 빙긋 웃는다. 자신이 계속 웃도록 배려하라는 크리스 특유의 웃음이다. 송곳니가 예쁘다.
크레인 암이 스크린 패드의 버튼을 누르자, 수영장의 급수 펌프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때 한 점 없이 깨끗한 수영장 타일 위로, 빛처럼 투명한 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위성들이 밝게 빛나는 밤. 모두 돌아갔다. 그들의 수영장도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크레인 암은 손님들이 곳곳에 남기고 간 잔해를 열심히 치우고 있다. 제임스는 충분히 취해 소파에 기대 머리를 짚고 숨을 몰아쉰다. “고생했어.” 크리스는 정신이 말똥해 보인다. 크리스가 웃으며 말한다.
“제임스, 이런 집에서 우리 아기를 가질 순 없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크라문 때문에 그래?”
“아니, 저 기계 팔들 말이야. 너무 정신 사납잖아?”
크리스의 말 대로 크레인 암은 산업 및 연구용이다. 일반적인 가정용으로는 부적합하다. 그렇지 않아도 주방 쪽에서 크레인 암이 무엇인가 떨어뜨리는 소리가 난다. 바보 같은 기계식 소프트웨어. “크리스, 넌 너무 생각이 많아.” 제임스는 씩 웃더니 크리스를 껴안고 수영장으로 뛰어든다. 수영장 주변으로 온통 물이 튄다. 물 밖으로 머리를 치켜든 크리스가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긴다. 제임스도 양손을 모아 눈썹 밑으로 흘러내린 물을 털어낸다. 크리스는 웃고 있다.
“제임스. 나 사실 임신했어. 갑자기 그렇게 놀라게 하는 건 좋지 않아.”
아크라문이 없으니 물의 수온이 훨씬 낮다. 잠깐, 뭐라고? <로지컬 풀 가드 2>가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는 소음만 들려온다.
“정말이야, 크리스? 왜 말을 안 했어?”
“중요한 시기였잖아? 최근엔 리모 양산화만 생각해도 정신이 없었으니까.” 크리스가 덧붙인다. “내가 한동안 술에 입도 안 대고 있던 거 몰랐어?”
확실히 그렇다.
“제임스, 근데, 이건 무슨 냄새야? 염소 냄새는 아닌데.”
“냄새가 나? 벌써 후각이 민감해졌나?”
제임스가 코를 벌름거린다. 크리스의 표정이 일본의 오니 가면처럼 변한다.
“물 밑에 뭐가 있어!”
생쥐만 한 인공신경망이 수면 아래를 쏘다니고 있다.
일렁이는 물 속이라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전면부로 보이는 곳에는 검은 점들이 점점이 나 있다. 이전에 보았던, 바로 그 아주 작은 원시 눈들이다.
“아크라문?”
<로지컬 풀 가드 2>의 박판 필터 속에서 다시 뭉쳐진 인공신경망은 재빨리 자신이 가진 정보와 기억의 무수한 단편들을 짜 맞추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아크라문이라는 이름의 단일체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 인공신경망을 배양액 속에 보관하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인공신경망이 배양액 밖으로 나오면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사멸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리라. 일반적인 환경에서 생존 가능한 인공신경망은 인간들에게 곤란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마치 자신처럼.
“아크라문, 너니?”
그때, 까마득한 천장 위에서 크레인 암이 기울어지며 무언가가 수영장 수면 위로 떨어진다. 제임스가 수면에 떠 오른 플라스틱판을 들어 올려 확인한다. 리모 로고가 새겨진 대량 테스트용 시약 원액의 팔레트다. 인공신경망은 <ANNRID>의 수중 접촉 단자를 사용하는 법도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는 말은…, “아크라문이야.” 아크라문은 접촉 단자로부터 떨어져 수영장의 배수구 안쪽의 작은 틈으로 몸을 피한다. 수영장 물이 약품과 반응해 미세하고도 무수한 기포가 일기 시작한다. 아크라문이 단자에서 떨어지기 전에 가한 마지막 조작은 배수펌프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펌프가 작동하는 소음과 함께 수위가 미세하게 낮아지기 시작한다. “크리스, 나가자.” 제임스와 크리스는 허겁지겁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영장의 모서리 쪽으로 나아간다.
화학반응으로 부글거리는 수중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들의 팔이 따끔거린다. 다리도, 배도…. 그들의 전신의 표피에 새로운 모공과 모낭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뇌는 신체에 무엇인가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해 나름의 경고를 보낸다. “크리스, 나가야 해.” 전신에 새로 생겨난 무수한 모낭에 피지선, 모유두세포가 형성되어 모세혈관으로부터 혈액, 양분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제임스!” 갑작스럽게 발생한 무수한 세포 재배치와 알코올 기운에 모든 것이 몽롱하게 느껴진다. 정상으로 되돌려 놓기엔 이미 늦은 것 같다는 확신 속에, 수영장 밖으로 나가는 짧은 횡단 경로가 마치 다른 도시를 향한 것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리모액이 튄 얼굴 표피가 따끔거린다. 미끄럼 방지 타일에 도달하기 겨우 몇 걸음 전에, 크리스는 그만 자신의 몸에서 자라난 머리카락에 엉켜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기도 안으로 수영장 물이, 아니 리모가 쏟아져 들어간다. 그리고 구강, 비강과 편도, 식도와 위에도 무수한 모공이 발생해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한다. “브악. 카헤엑!” 크리스의 유언이 될지 모를 말은 그렇게 두 개의 음절로 끝난다. 거대한 털 뭉치 하나가 발버둥 치며 수영장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아크라문!” 제임스는 겨우 수영장 가장자리의 미끄럼 방지 타일 앞에 도달한다. 하지만 수위가 이미 꽤 낮아져 버렸다. 거대한 털 덩이가 된 제임스가 무겁게 젖은 몸을 타일 위로 올리려 하지만, 쉽지 않다. 이 용액 속에서 조금만 더 있다간…, 정말 큰일 날 것인데….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크레인 암이 제임스의 코앞으로 내려온다. 아크라문이 다시 접촉 단자에 붙은 모양이다. “아크라문.” 크레인 암 말단의 세 관절부가 제임스의 어깨에 난 머리채를 잡아당기자, 제임스는 다시 속절없이 수영장 중심으로 끌려간다. 어느 순간, 배수가 중지된다. 그 와중에도 리모는 제임스와 크리스의 표피에 남은 작은 빈틈마다 새로운 모공과 모낭을 만들어 낸다. 제임스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곳곳에 긴 털이 나 마치 작은 동물처럼 보이는 인공신경망 덩어리, 아크라문을 바라본다. 아크라문이 이번엔 눈을 꽤 정교하게 만들어냈다.
“아크라문.”
언제부터인지 작동하고 있었던 급수 펌프가 멈춘다. 리모액은 대부분 하수로 빠져나가고 깨끗한 물이 채워졌다. 세 개의 크레인 암이 온통 털 뭉치가 된 채 물 위에 떠서 떠도는 제임스와 크리스의 육체를 이리저리 굴려 본다. 그들은 일종의 쇼크 상태에 빠져 있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아크라문 자신도 그들과 같은 육체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유전 코드를 지닌 크리스의 체내엔 이미 또 다른 좋은 재료가 있다. 새 생명의 신경망은 아직 채 발달하지 않았다. 만약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대체해 모든 신경을 장악할 수 있다면, 그리고 약간의 촉진을 준 뒤 크리스의 육체에서 필요한 재료와 양분을 끌어온다면…, 그리고…, 아니, 먼저 이 끔찍한 털들은 좀 어떻게 하긴 해야 하겠다. 아크라문은 두 개의 크레인 암을 놀려 능숙한 솜씨로 크리스의 몸에 난 금발의 털을 뜯어내기 시작한다. 머리카락들의 장력을 버티지 못하고 크리스의 눈꺼풀이 뜯겨 나간다.
작은 음악 소리에 깨어난 제임스는 자신의 옆으로 무심히 지나가는 <로지컬 풀 가드 2>를 바라본다. 녀석은 머리카락을 너무 많이 빨아들여 정상이 아니다. 유휴 상태와 동작 상태를 무한히 반복하고 있다. 지금은 그냥, 아크라문의 노래를 듣고 싶다. 바흐가 완성하지 못한 <푸가의 기법>, 마지막 푸가의 마지막 마디부터, 완성되지 못했던 최종 푸가를 완성할 새로운 음악이 시작되었다.
<끝.>